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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김정은 위원장 앞으로 보내는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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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오늘은 두 번째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날입니다. 온 한국 국민이 회담 결과가 성공적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북한 문제에 관해 남한 여론이 진보와 보수로 갈려있지만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를 갈망함에는 모두 한 마음입니다. 아마 북조선 주민도 똑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함께 피와 역사를 나눈 남한 동포의 염원과 김 위원장이 책임져야 하는 북조선 주민의 소망을 이번 회담에서 꼭 이루어주기 바랍니다.

북한 경제는 관료가 시장·무역을 #보호하고 있는 관경 유착 경제 #경제와 사회주의는 양립 불가 #완전한 비핵화로 제재 해제해 #북 주민에 경제개발 선물하길

북한에게 이번 기회는 너무 소중합니다. 미국은 북한의 붕괴를 원하지 않는다고 이미 밝혔습니다. 남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국민 다수도 북한 붕괴나 급진통일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2018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빨리 통일돼야 한다’는 남한 국민은 9.9%에 불과합니다. 반면 점진적인 경제통합은 남북 모두에게 큰 혜택을 가져다줍니다. 제재가 풀리면 경협이 활성화될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남북 경제가 통합되면 북조선은 연평균 10% 이상으로 급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통일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최근 한 가짜 뉴스가 통일은 한국에 피해만 준다고 필자가 중앙일보에 기고한 것처럼 꾸며 퍼뜨렸지만 이는 제 이름을 도용한 엉터리 주장입니다.

김정은 위원장도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잘 알겠지만 북조선 경제는 많이 변했습니다. 필자가 사회주의를 연구한지 30년이 넘었지만 북조선 같은 사회주의 경제는 전례가 없습니다. 70%를 넘는 주민이 시장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한 달 월급이 장마당 환율로 1달러가 채 되지 않은 많은 관리들은 대외 무역이나 시장에서 나오는 지대(rent)로 살고 있습니다. 북조선 경제는 군과 관료가 자신의 부와 생계의 원천인 시장과 무역을 사실상 보호하고 있는 관경(官經)유착 경제입니다. 위원장도 이를 막을 수 없는데 어떻게 사회주의가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사회주의 경제로 되돌아갈 다리는 이미 끊어졌습니다.

김병연칼럼

김병연칼럼

‘경제’와 ‘사회주의’는 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경제발전은 양립 불가합니다. 위원장이 집권한 후 시장 거래를 묵인한 것과 돈의 출처를 묻지 말고 투자자금으로 사용하라는 지침은 좋은 정책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주의를 완전히 버려야 경제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사기업 창업을 비롯해 생산 수단의 사유를 제도적으로 인정해야 본격적인 성장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신년사에서 내비친 대로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사회주의 자력갱생을 시도할 생각이라면 이는 오판입니다. 20세기 중반 컴퓨터 사용이 본격화되자 사회주의의 승리는 시간문제라며 소련 학자들이 크게 환호했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 완벽한 중앙계획을 만들면 된다고 믿었지만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김 위원장 자신을 위해서도 핵보다 경제가 더 필요합니다. 현실을 냉정하게 보기 바랍니다. 핵은 주민의 자긍심을 부추길 수는 있습니다만 주린 배를 채워줄 순 없습니다. 지금 북조선 주민은 잘 살고 싶은 욕구로 충만한 경제적 인간으로 변모했습니다. 이들은 배급받지 않고 시장에서 스스로 일해 가족을 부양하는 자유와 기쁨을 다시는 빼앗기지 않으려 합니다. 위원장이 핵을 내려놓고 경제 개발의 기회를 선사한다면 주민은 만세를 부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북조선 정권의 최대 적은 외부 세력이 아니라 잘 살고 싶은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스스로의 정책과 제도입니다.

북조선의 구조적인 문제를 성찰하기 바랍니다. 이번 협상에서도 핵 문제를 근원적으로 풀지 못한다면 큰 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 협상 결과는 북조선과 김정은 위원장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재 해제의 관건은 북조선의 완전한 비핵화입니다. 단번에 모든 비핵화는 아니더라도 한국 및 국제사회와 미 의회를 만족시킬 수 있는 중대한 비핵화 조치마저 거부한다면 필자도 지속적인 제재를 주장할 것입니다. 남한을 지렛대 삼아 제재를 풀어 보겠다는 꿈은 꾸지 말기 바랍니다. 남한 정부와 다수 국민은 이제 그런 수를 꿰뚫어 볼 정도로 성숙했습니다. 북한 경제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말하지만, 지금 같은 강도의 제재를 북한 경제가 향후 2년 이상 견디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필자의 말을 한반도와 우리 동포를 사랑하는 학자의 고언으로 받아들여 주기 바랍니다. 저도 좋은 날이 오면 북조선의 맑은 하늘을 보며 거기서 새로운 미래로 가슴이 벅차 오를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이제 선택은 김정은 위원장 몫입니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