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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누라 같네” 성희롱···남성 승객에 떠는 여성택시기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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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30년차인 서울의 개인택시 기사 전모(62·여)씨는 남성 승객이 탈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지난해 11월 어느 날 이른아침에 겪은 일 때문이다. 전씨는 경기도 집에서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한 남성 승객이 그의 옆 좌석에 탑승했다. 술 냄새를 풍기던 이 남성은 경기도 하남시의 한 장소로 가자고 했다. 전씨는 “서울 택시라 경기도 내에서 영업하는 건 불법이다”며 하차를 요청했다.

피해 여성 기사 5명 심층 인터뷰 #폭행·성희롱·무임승차 사례 다양 #서울에만 여성 택시기사 744명 #“격별 설치, 피해 대처요령 교육”

하지만 이 남성은 “XXX아, 요금 주면 되지 않느냐. 그냥 가자”며 욕설을 퍼부었다. 전씨가 택시를 경찰서 방향으로 몰자 그는 운전대를 꺾으며 막았다. 택시가 멈춰 서자 그는 주먹으로 전씨의 얼굴을 수차례 가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가락을 전씨의 입 안에 넣고 꼬집어 뜯기도 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있던 전씨는 꼼짝 못하고 10분 넘게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전씨의 얼굴은 피범벅이 됐다. 이 남성은 폭행 후 도망갔다. 전씨는 “잇몸이 찢어져 병원에서 여러 바늘을 꿰맸고, 코피가 오랜 시간 멈추지 않았다. 전치 3주 진단을 받았다”면서 울먹였다.

최근 경기도 남양주 여성 택시기사 폭행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여성 택시기사에 대한 일부 남성 승객들의 폭언·폭행이 도를 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일보는 12일 서울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의 협조를 얻어 조합에 소속된 여성 택시기사 502명에게 승객으로부터 폭행·언어폭력 등을 당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서울시에 등록된 여성 택시기사가 744명(지난해 12월 기준)이다. 서울 전체 택시기사 약 8만 명 중 1% 정도에 해당한다.

불과 3~4시간 만에 5명의 여성 기사가 기자에게 구체적인 피해 사실을 털어놨다. 이들은 “남성 승객에게 이유 없이 심한 언어폭력을 당해도 참고 목적지까지 가는 일이 다반사다. 무슨 짓을 할까 봐 겁이 나서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이들은 모두 성씨 또는 영문 이니셜을 요청하는 등 익명을 요청했다.

여성 택시기사들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폭행·성희롱 등을 겪은 후 운전대를 잡기 겁이 난다"고 호소했다. 사진은 서울 시내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들.[뉴스1]

여성 택시기사들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폭행·성희롱 등을 겪은 후 운전대를 잡기 겁이 난다"고 호소했다. 사진은 서울 시내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들.[뉴스1]

남성 승객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사례가 가장 많았다. 여성 택시기사 A(53)씨는 2017년 12월 택시 뒷좌석에서 담배를 피우는 한 남성 승객(50대)을 제지했다. 하지만 계속 담배를 피우던 이 남성은 “내 차는 수입차인데, (당신은) 뭐 이런 차를 몰면서 그러느냐”고 반말로 짜증을 냈다.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를 쓰면서 “성적(性的) 능력이 떨어지니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다”는 말도 했다. 지난해 3월에는 한 남성 승객으로부터 “내 작은 마누라 같다”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여성 택시기사 B(50)씨는 “하루에 많게는 남성 승객 10명 정도가 ‘어, 여자가 운전하네?’라고 말하고, 이 중 일부는 음흉하게 훑어본다”고 토로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택시요금을 내지 않으려고 손님으로부터 욕설과 폭행을 듣는 것도 다반사다. 지난해 1월 임모(60·여)씨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돈이 없다”며 그냥 내리는 한 남성 승객과 실랑이를 벌였다. 임씨가 따라 내려 신용카드 결제를 요구하자 임씨 앞에서 “소변을 보겠다”며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내리려고 했다. 임씨는 “다행히 이 모습을 목격한 한 청년의 도움으로 가해자를 경찰서에 신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40대 여성 기사 C씨는 지난해 12월 50대 남성 승객으로부터 위협을 당했다. 그는 욕설을 하고 주먹으로 C씨의 어깨와 운전대를 툭툭 쳤다. 요금도 내지 않고 내리려고 했다. C씨는 “인근 경찰서로 가서 신고하고 블랙박스 영상을 증거 자료로 제출했다”고 말했다.<영상 참조>

그나마 C씨는 증거자료가 있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폭행을 당해 전치 3주 진단을 받은 전씨는 경찰에 신고했지만, 미해결 사건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차 안 블랙박스가 고장 나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 택시기사 전모(62)씨의 상해진단서. 그는 지난해 11월 한 남성 승객으로부터 얼굴 등에 폭행을 당해 전치 3주 진단을 받았다.[사진 전모씨 제공]

여성 택시기사 전모(62)씨의 상해진단서. 그는 지난해 11월 한 남성 승객으로부터 얼굴 등에 폭행을 당해 전치 3주 진단을 받았다.[사진 전모씨 제공]

택시·버스 기사 폭행 사건은 매년 3000건 안팎으로 발생하고 있다. 하루에 8번꼴로 발생한다는 뜻이다. 경찰은 피해자 대다수가 택시기사인 것으로 추정한다. 버스의 경우 2006년부터 보호 격벽 설치가 의무화돼 폭행에 노출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운전자 폭행은 가중처벌 대상으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

강상욱 한국교통연구원 대중교통센터장은 “일본·미국 등에선 택시 운전석 격벽 설치가 보편화돼 있다. 운전자 폭행을 예방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책이기 때문이다”면서 “우리도 공간이 협소해진다고 불편해하지 말고, 격벽이 정착될 수 있도록 정부·업계·승객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올해 택시 250대에 격벽을 시범 설치한다. 윤지연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택시기사는 남성의 직업’이란 정형화된 인식이 깔려 있는 가운데 밀폐된 공간에서 여성 택시기사들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면서 “가해자 처벌을 강화하고, 여성 기사들에게 피해 시 대처 요령 등이 담긴 안내서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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