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영화] '세크리터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지난 26일 개봉한 '세크리터리(원제 Secretary, 비서라는 뜻)'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하거나 멍한 표정이다. 변호사와 그의 비서가 사랑에 빠진다는 스토리만 믿고 진한 로맨스를 기대한 이라면 자못 황당하리라.

장르를 따지자면 로맨틱 코미디지만 달콤새콤 아기자기한 러브스토리도, 간지럼 태우듯 천진한 웃음거리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기이한 애정영화다.

여주인공 리(매기 길렌홀)는 막 요양원에서 퇴원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밝히기 부끄러운 병을 가졌다.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쾌감을 느끼는, 일종의 자학(自虐)증세다. 다 큰 처녀건만 엄마의 손길이 없으면 자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마마 걸'이기도 하다. 사회 적응에 애쓰던 그녀는 타이핑을 배워 마침내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한다.

한데 변호사 에드워드(제임스 스페이더)는 첫 인상부터 수상하다. 상대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을 뿐더러 혼자서 꼼지락꼼지락 뭔가를 숨기는 듯하다. 이혼해 달라며 고함치는 부인 앞에서 쩔쩔맬 땐 영락없이 소심하고 겁 많은 가련한 중년 남자다. 비서와의 관계도 서먹서먹하다고 할 만큼 거리를 둔다.

어느 날 리가 병이 도져 사무실 구석에서 자해를 하는 광경이 에드워드에게 발각된다. 그는 리를 자기 방으로 부르더니 타이핑에 오타가 있다며 갑자기 그녀의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당황하던 리는 때리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묘한 쾌감을 느낀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가학-피학(사디즘-마조히즘)의 형태로 발전해 간다.

줄거리만 보면 '변태'스러운 영화 같다. 하지만 묘하게도 이 같은 상식을 뒤엎는 접근이 영화에 깊이를 준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란 즐겁고 유쾌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고통과 불쾌함 속에서도 사랑은 싹틀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사랑의 본질이란 아름다우냐 추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믿음에 근거한 상호 관계'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배우들의 연기도 아주 인상적이다. 특히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1989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탔던 제임스 스페이더는 이번에도 '상처받은 영혼'의 모습으로 가슴을 파고 든다. '세크리터리'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독창성 부문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감독은 '히트 미'의 스티븐 세인버그. 18세 이상 관람가.

이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