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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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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천황께서 조선 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내린 칙유(勅諭·왕의 포고문)에 대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 시험지를 들여다보던 열여덟 살 학생은 단 두 줄을 적었다.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졸업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나중에 가톨릭 사제가 됐다. 오는 16일로 선종 10주년을 맞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다.

사제가 되고 나서 독일에 유학했던 시절, 그는 ‘교회의 사회 참여’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62~65년) 정신에 감화됐다. 민주화에 힘을 보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려던 71년 말이었다. KBS가 전국에 생중계한 성탄 자정 미사에서 그는 강론 원고에 없던 말을 꺼냈다. “정부와 여당 국회의원 제위에게 상당수 국민의 양심을 대신해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국가보위 특별조치법의 입법이 필요불가결의 것이라고 양심적으로 확신하고 계십니까.” TV를 보다 화들짝 놀란 박 대통령은 생중계를 끊으라고 지시했다. 87년 6월 경찰이 명동 성당에 진입해 시위 대학생들을 연행하려 할 때 “먼저 나를 밟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던 건 유명한 일화다.

김 추기경은 세상에 많은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상황에서 새겨들어야 할 말씀도 많다. “개혁에 대해 사람들이 왜 걱정하는지 진지하게 헤아려 보고 신속·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국민 절대다수가 지지하는 것으로 과신,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줄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중략)…많은 이들이 개혁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염려합니다. 이들은 대통령이나 그 측근이 너무 자신만만하여 중대한 결정을 독단적으로 내리고 있어 결국 국민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고 걱정하는 것입니다.”(93년 9월 한국발전연구원 초청 강연) “…한 가지만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며 절대적일 수도 없습니다.…어떤 문제라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고, 대화할 때 나의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주입하려 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들어줄 필요가 있습니다.”(김수환 추기경 잠언집 『바보가 바보들에게』 2권)

각계 인사 131명과 함께 한 ‘2005 희망 제안’을 통해서는 “보수와 진보로 양극화된 사회를 통합하고 실업자들을 위해 일자리를 만들자”고 했다. 만일 지금 김 추기경 같은 큰 어른이 있어 이런 말씀들을 다시 한다면 어땠을까. 새삼 그가 떠난 자리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