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박근혜의 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지극히 이성적인 지인이 있다. 미소를 두고 얼굴 근육 10여 개의 경련 현상일 뿐이라고 해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 그가 타인의 미소에 탄복하는 걸 봤다. 자신들이 큰 실수를 했음에도 상대가 이해한다는 듯 지었다는 표정을 두고서다. 이런 말도 들었다고 했다. “아휴, 얼마나 놀라셨어요?” 그때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감성은 있었다.

이토록 내밀한 면모를 드러내 보이도록 한 이가 바로 대선후보 시절의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실상에선 대단히 까다로운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적어도 당시엔 추호의 짜증도 내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2006년 5월 유세 중 피습을 당했을 때 부랴부랴 병원을 찾은 유정복 당시 비서실장에게 “많이 놀라셨죠”라고 위로의 말을 건넨 것과 유사한 사례이겠다.

“경선 과정의 모든 일들, 이제 잊어버립시다.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며칠, 몇 날이 걸려서라도 잊읍시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승복 연설이다. 돌이켜보면 박 전 대통령은 잊지 않았고 두고두고 ‘결제’했다. 하지만 연설 덕분에 경선 불복이란 한국 정치의 고질병은 사라졌다. 리더십이 민주적인 건 아니었으나 행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긴 했다.

누군가 “박 전 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선친(박정희)의 음덕이 그리 강했던 것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박 전 대통령 스스로 빛을 내던 순간이 있긴 했다.  덧없는 기억을 거론한 건 최근 박 전 대통령과 몇몇 측근들이 보인 모습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국민, 좁게는 대선 때의 지지자들을 ‘배신’한 건 자신들인데,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남들을 타박하고 있어서다. 왜 탄핵에까지 이르렀는지 새삼 사유들이 떠오른다. 여전히 ‘박근혜’를 내세울 뿐, “사회적 맥락이 없고, 과정도 없이 추대된 지도자”(윤여준)가 길게 드리운 암흑이다.

얼마 전, 박근혜 청와대에서 일했다가 처벌됐던 한 정치권 인사와 나눈 대화다. 문재인 대통령이 보수 진영의 분열을 노려 내년 총선 전에 박 전 대통령을 사면할 것이란 세간의 추측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못할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나오면 문재인 정부도 감당을 못할 것이다.” 현 정부를 비판할 것이란 전제였다. “박 전 대통령이 현 정부 못지않게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기는 이들을 비난할 수 있다. 이전에도 종종 그랬다”고 하자 그는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한결 잦아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보수의 자멸이겠지….” 망하는 게 보수만이겠는가.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