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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신뢰 축적 없이 사회적 대화 지속 어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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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경제학) 전 노동부 장관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경제학) 전 노동부 장관

기존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를 확대하면서 명칭을 바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 민주노총을 참여시키려고 공을 들였던 문재인 정부의 노력이 끝내 무산됐다. ‘노동 존중’을 모토로 내세운 문 정부로서는 실망감이 클 것이다. ‘노동귀족’으로 불려온 민노총의 무책임한 태도도 비판을 받고 있다. 민노총의 참여 무산 이후 한국사회 일각에서 유럽식 코프라티즘(corporatism·조합주의)에 대한 회의론이 새삼 고개를 들고 있다. 심지어 경사노위 무용론까지 성급하게 나오고 있다.

민노총, 경사노위 참여 끝내 거부 #대화 심화보다는 파행 격화 우려 #사회적 대화기구는 신뢰가 핵심 #성과 내세우는 조급함 경계해야

그러나 곧이어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광주형 일자리’ 프로젝트가 노·사·민·정 합의로 타결됐다. 이에 따라 사회적 대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평가되면서 정부 역시 성급하게도 광주형 일자리의 조속한 확산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20여 년만의 민노총 복귀를 염두에 두고 ‘완벽한 사회적 대화 기구’를 상정한  경사노위는 지난해 11월 고용노동 문제 등 현안을 풀 새로운 사회적 대화 기구로 출범했다. 이 기구를 의결기구로 간주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 표명은 경사노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정치적 수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노동사회의 전후 맥락에 비춰 볼 때 그다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는 노사 간은 물론 전반적으로 사회적 신뢰도가 낮은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를 심화시키기보다는 결과의 유불리만 놓고 갈등과 파행을 격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노사정위의 경험을 통해 이미 우리는 사회적 대화 기구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터득했다. 정치 풍향에 좌우되지 않고 대화를 지속함으로써 상호신뢰를 축적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합의의 결과에 매달릴수록, 더구나 그것이 현안에 대한 것일수록, 사회적 대화는 이어지기가 힘들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다.

시론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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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탄력근로제 확대 등 현안을 빌미로 사회적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노동계가 비난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지만 이미 국회에서 처리하기로 여야가 합의한 현안을 새삼 경사노위로 돌린 운영의 미숙함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문제는 근로시간 단축과 동시에 처리했어야 할 사안이다. 경사노위는 포괄적이거나 미래지향적인 사안에 대해 의견 개진과 더불어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능한 절충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 상호신뢰를 축적해 나가는 데에 역점을 둬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대화는 끊임없이 지속해야 한다. 특히 한국과 같이 사회적 신뢰도가 낮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자산인 신뢰 인프라가 취약한 사회에서 지속적인 사회적 대화야말로 이를 타개해 나가는 유력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사안 자체가 ‘한방(one shot)’에 해결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사안을 놓고서도 연관되는 사안에 대한 논의를 포함해 사회적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갈 필요가 있다.

끈질긴 사회적 대화를 통해 최근 타결된 광주형 일자리도 예외가 아니다. 일반적으로도 그렇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지금까지보다 앞으로가 더 많은 논의를 해야 하는 사안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현재 수준으로 설사 실천에 옮겨진다 하더라도 그 지속가능성이 심히 우려되기 때문이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해당 지역에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민·관 합동으로 투자하고, 투자유치와 더불어 해당 기업의 경쟁력을 위해 동종 업종에 비해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대신 지자체가 당해 근로자의 교육·주거 등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직·간접적 고용창출 효과만 하더라도 1만여 명에 이르는 매우 매력적인 프로젝트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정작 그 지속가능성을 결정할 임금·근로시간 등 핵심적 근로조건을 담보하는 부분에 가서는 사실상 얼버무리고 있는 셈이다. 5년으로 한정한 기간도 문제이지만, 기본적으로 법적으로 보장된 노동기본권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당사자가 아닌 노·사·민·정의 사회협약으로 제한하는 데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는 찾아볼 수조차 없다.

정부로서는 일자리 정책에 대한 비판에 직면해 서둘러 성사시킬 정치적 동기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사·민·정의 사회적 대화의 훌륭한 결실과 성과로 내세우고 싶을 것이다. 좋은 취지 자체는 인정한다 하더라도 핵심을 회피한 부실한 사회협약이기에 염려가 앞선다. 그런데도 이 모델을 상반기 중에 다른 지역으로 확산시키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무모함으로까지 읽힌다.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사회적 대화의 전도(前途)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까 봐 염려되기 때문이다.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경제학)·전 노동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