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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귀에도 들어간 해운업계 회계 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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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년의 숫자로 읽는 경제]

현대상선의 1만3100TEU 컨테이너선. [사진 현대상선]

현대상선의 1만3100TEU 컨테이너선. [사진 현대상선]

부채비율 감당 못한다는 해운업계…文 "현황 듣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 기업인들을 초청한 지난달 15일이었습니다. 발언 기회를 얻은 우오현 SM그룹 회장은 올해 해운업계 최대 난제로 떠오른 선박 리스(Lease) 회계처리 문제를 건의했습니다. SM그룹은 해운사 SM상선의 모회사입니다. 우 회장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했지요. 그는 "해운사들은 선박 한 두척만 사들여도 높은 부채비율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라며 부채비율을 낮출 수 있는 해운업계만의 회계 기준 마련을 대통령에게 요청했습니다. 생소한 주제였겠지만, 문 대통령도 "추후 해양수산부 장관을 통해 SM상선 관련 현황을 듣도록 하겠다"며 관심을 보였습니다.

우 회장이 대통령에게 건의한 내용을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해운사들은 영업에 필요한 선박을 목돈을 주고 사서 쓰지 않고 오랜 기간 빌려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선박 리스'라고 하지요. 흔히 렌터카 회사에 매달 일정 요금을 내고 장기간 이용하는 자동차리스와 비슷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5일 청와대에서 삼성·현대차·LG·SK 등 대기업 대표와 중견기업인, 대한상의와 지역상공회의소 회장단을 초청해 간담회를 했다. 문 대통령과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5일 청와대에서 삼성·현대차·LG·SK 등 대기업 대표와 중견기업인, 대한상의와 지역상공회의소 회장단을 초청해 간담회를 했다. 문 대통령과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올해부터 '선박 리스'는 '부채'로…부채비율 급등 예상 

그동안 해운사들은 선박을 빌린 대가로 지불하는 요금(리스료)만 손익계산서상의 비용으로 처리했습니다. 배를 빌려 쓴다고 이걸 누군가에게 빌려온 자산이란 의미인 '부채'로 기록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바뀐 국제회계기준(IFRS)에 따라 선박을 빌릴 때, 장기간 갚아야 할 비용을 한꺼번에 '부채'로 회계장부에 기재해야 합니다. 기존엔 100만원짜리 물건을 10개월 할부로 샀다면 매달 10만원씩만 비용으로 처리하면 됐지만, 앞으로는 물건을 빌린 즉시 부채 항목에 100만원을 기록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해운사들의 부채비율은 바뀐 기준을 적용하기 전보다 높아지겠지요. 우 회장은 회계처리 기준만 달라졌을 뿐인데, 빚이 급격히 늘어나 부실 회사처럼 보이게 되면 사업에 필요한 돈을 구하기 어려워질 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겁니다.

해수부 "회계 기준 변경, 적극 협의하겠다" 답변

해운업 진흥 정책을 담당하는 해수부는 문 대통령을 대신해 즉각 우 회장에게 답변 서신을 보냈습니다. 김영춘 장관 명의 서신에는 "금융위원회 등 관계 부처와 적극적으로 협의할 수 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해운업계 '난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것일까요?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치가 않습니다.

회계기준를 관리·감독하는 금융당국은 우 회장의 건의가 정책에 반영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고 잘라 말합니다. 건의 내용은 이미 국제회계기준위원회에서도 검토가 됐고, 그 결과 항공기·선박을 운용하는 데 쓴 리스는 올해부터 부채로 기록하기로 결정이 됐기 때문입니다.

국제회계기준위원회는 기업의 회계 투명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결정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투자자·채권자 등이 해운사나 항공사에 투자할 때 리스 관련 부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부실 기업과 우량 기업을 선별하기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검토된 적이 없었던 내용이라면 재차 국제회계기준위원회에 기준 개정을 요구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IFRS를 채택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 적용되는 기준을 국내 해운업계가 반대한다고 해서 이를 뒤집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한국이 국제회계기준을 채택하고 있는 이상, 국제회계기준위원회에서 확정된 사안은 적용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전문가 "국제 기준 적용 불가피…체질 개선으로 부채 줄여야"

업황이 나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해운업계는 회계장부라도 '예쁘게' 보이고 싶은 유인이 있을 순 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회계 기준을 바꾼다고 해운업계의 과잉 부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체중계를 고쳐 정상 몸무게처럼 보이도록 하기보다는, 정상 몸무게가 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고, 정부도 이를 돕는 방향으로 해운 산업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한상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는 "새 국제회계기준 적용은 피할 수 없는 만큼, 해운업계는 강도 높은 체질 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습니다.

세종=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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