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시즌에 즈음해서

중앙일보

입력

< 축혼가 >

스무 살 갓 넘은 나이에
학예회에 출연한 아이들처럼 즐겁게
부부가 되어 이들은
평생을 함께 살기로 굳게 약속하고
일가 친지가 모인 자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사진 촬영에 신이 난 신랑신부를
모두들 축하할 뿐,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걱정도 하지 않았다 주례사의
말이 좋아 그렇지 인생의
망망대해 또는 이백만 대의 자동차가 들끓는
서울 거리로 이렇게 떠나보내다니 아무래도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 김광규(1941~ ) 《축혼가》 -

담담한 산문성을 따라가다가 놀라운 극적 긴장에 이르고 만다. 마비되어 잊고 있던 우리들의 일상에서 예리한 비명이 터져나온다. 허를 찔리고 얼얼한 그 고통이 감동으로 화하는 접점에 이 시는 놓인다.

'축 결혼'과 '부의'가 쓰인 흰 봉투 사이를 번갈아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오늘도 저 교통체증 한가운데를 누군가는 통과하리라. ----- 시인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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