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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거래 ‘벌집계좌’ 주의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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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신생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고가의 수입차를 경품으로 내걸고 투자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이들 거래소는 개인의 실명확인이 안 되는 법인계좌(벌집계좌)를 쓰고 있다. [각사 홈페이지]

신생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고가의 수입차를 경품으로 내걸고 투자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이들 거래소는 개인의 실명확인이 안 되는 법인계좌(벌집계좌)를 쓰고 있다. [각사 홈페이지]

“1등에 당첨되면 경품으로 람보르기니 우라칸을 드립니다. 2등 경품은 포르쉐 박스터 GTS, 3등은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입니다.”

고객 본인 계좌 못 쓰는 신생업체 #거래소 명의 ‘벌집계좌’로 입출금 #별도 장부로 고객 자산 명세 관리 #투자자가 자기 돈 못 찾게 될 수도 #벌집계좌 막을 법안 1년째 계류중

신생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피닛이 경품 행사를 진행하며 내건 상품 목록이다. 지난 17일 서비스를 시작한 이 업체는 다음 달 17일까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경품을 지급한다고 안내했다. 친구 초대 행사를 통해서도 포르쉐 박스터 GTS 등 고가의 수입차를 경품으로 내걸었다.

이 업체는 ‘거래량 순위에 따라 추첨해 경품을 지급한다’ ‘당첨자에 한해 개별 연락을 드릴 예정’이라는 것 외에 별다른 조건을 공지하지 않았다. 업계에선 경품 응모 자격이나 당첨자를 외부에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이 행사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런 식의 ‘수입차 마케팅’은 다른 신생 암호화폐 거래소에서도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지난해 11월 영업을 시작한 암호화폐 거래소 빗키니도 경품 행사로 롤스로이스 팬텀, 아우디 R8, BMW i8 등 고가 수입차를 내걸었다.

빗키니를 운영하는 법인인 라임오렌지나무 관계자는 “다른 거래소와 경쟁하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진행하는 이벤트”라며 “신규 회원을 모집하고 거래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지만 코인(암호화폐) 시장이 포화 상태라서 비용 대비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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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경품 행사의 신뢰성뿐이 아니다. 이런 신생 거래소에는 투자자들이 본인의 이름으로 계좌를 만들어 투자할 수 없다. 금융 당국과 은행이 신생 거래소에는 고객의 실명을 확인한 계좌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거래소는 은행에서 법인 계좌를 만든 뒤 그 계좌를 통해 수많은 투자자의 돈을 넣고 빼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고객의 자산 명세는 은행이 아닌 거래소의 별도 장부에서 관리한다. 이른바 ‘벌집계좌’로 불리는 편법이다. 고객들의 계좌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마치 벌집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점에서 벌집계좌라는 말이 붙었다.

당초 금융 당국은 이런 식의 벌집계좌는 위험하다고 보고 금지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월 ‘가상통화(암호화폐) 관련 자금세탁 방지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서 암호화폐 거래 실명제(실명확인 가상계좌)를 채택한 거래소는 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의 단 4곳 뿐이다.

신규 가상계좌는 안 해주고 벌집계좌는 막았는데, 지난해 10월 사달이 났다.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이즈가 농협은행을 상대로 낸 가처분 신청에서 법원이 거래소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본안 판결이 나올 때까지 농협은행이 코인이즈 법인 계좌의 입금을 정지시키면 안 된다는 결정이었다.

그러자 다른 가상화폐 거래소들도 우후죽순 식으로 벌집계좌를 통해 공격적인 회원 모집에 나섰다. 고가의 수입차를 경품으로 내건 일부 업체의 마케팅도 그 일환이다. 일단 벌집계좌에 들어간 돈은 실명의 개인이 아니라 거래소의 뭉칫돈으로 관리된다. 따라서 고객이 돈을 출금하고 싶어도 거래소가 안 해주면 법적 소송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투자자 입장에선 내 돈을 제대로 찾지 못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만일 사기나 해킹 등으로 거래소 장부가 조작되면 투자자들은 보호받기 어렵다. 거래소 운영자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장치도 없다. 김정훈 금융감독원 블록체인연구반 팀장은 “벌집계좌의 가장 큰 문제는 특정 계좌에 여러 경로로 돈이 몰렸다가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자금 세탁 위험이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신생 거래소들은 현실적으로 벌집계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은행에 가서 실명확인 가상계좌를 열어 달라고 해도 안 해주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금융 당국은 은행의 판단에 맡겼다고 하지만, 은행들은 자금세탁 방지 가이드라인의 까다로운 조건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라임오렌지나무 관계자는 “은행에선 ‘당국의 지시’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실제로 책임지는 사람은 누군지 명확하지 않아 답답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국회로 공을 떠넘겼다. 금융위는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암호화폐 관련 법안(특정 금융거래 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돼야 벌집계좌의 규제 문제도 본격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법안은 제윤경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금융위와 협의해 지난해 3월 발의했지만 아직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김용범 금융위 부위원장은 지난해 11월 국회에 출석해 “실명거래가 아닌 법인계좌를 통한 취급업소(거래소)가 다수 운영 중에 있다”며 벌집계좌의 존재를 사실상 인정했다. 한 대형 암호화폐 거래소의 관계자는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따르는 거래소는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벌집계좌로 고객을 모으는 업체들은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막고 투명한 거래를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암호화폐 관련 제도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용환 기자 jeong.yonghwa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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