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양승태도 수첩에 발목…‘大’자 쓰인 이규진 메모가 결정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3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후 굳은 표정으로 검찰 차량으로 걸어가고 있다. 전직 사법부 수장으로 처음 구속 된 양 전 대법원장은 24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을 이르면 오늘(25일)부터 소환해 조사할 방침이다. [최승식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3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후 굳은 표정으로 검찰 차량으로 걸어가고 있다. 전직 사법부 수장으로 처음 구속 된 양 전 대법원장은 24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을 이르면 오늘(25일)부터 소환해 조사할 방침이다. [최승식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 발부를 이끈 ‘스모킹 건’으로 이규진(57·사법연수원 18기)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업무수첩이 꼽힌다. 하급자가 받아 적은 깨알 같은 메모에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발목을 잡혔다.

대법 양형위 근무한 이규진 판사 #2015년부터 3년간 꼼꼼히 기록 #‘大’는 양승태 ‘長’은 법원행정처장 #검찰, 지시사항 표시한 걸로 봐

검찰에 따르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지난해 8월 20일 이 부장판사의 법원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며 업무수첩 3권을 확보했다. 이 수첩은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근무하던 이 부장판사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 기록한 것이다. 여기엔 전국 법원의 인사와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법원행정처 수뇌부의 논의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 부장판사가 헌법재판소에 파견된 판사와 공모해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인 민감한 사건들에 대한 사건보고서, 재판관들이 서로 토론한 평의 내용 등을 수십 차례에 걸쳐 대법원 양형위원회 등에 e메일로 전달한 것으로 지목했다. 또 법원행정처가 소속 법관들을 동원해 상고법원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판사들을 사찰한 내용을 담은 문건을 삭제한 혐의 역시 적용했다. 이런 내용 또한 이 부장판사의 수첩에 고스란히 담겼다고 한다. 이는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한 주요 혐의들과도 일치한다.

특히 검찰은 수첩 곳곳에 적힌 ‘大(대)’와 ‘長(장)’ 두 개를 눈여겨봤다. 검찰은 ‘大(대)’로 표시된 부분은 양 전 대법원장, ‘長(장)’으로 표시된 부분은 법원행정처장의 지시사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관련기사

23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나선 양 전 대법원장 측은 이 부장판사의 수첩에 대해 “조작 가능성이 있다” “모함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고 방어에 나섰다. ‘大(대)’를 추후에 써넣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수첩 곳곳에 한자가 적혀 있어 조작 가능성이 적고 이 부장판사의 진술도 일관된다”고 반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선 법원이 영장 발부 사유로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적은 데 대해 양 전 대법원장이 불구속 수사를 받을 경우 이 부장판사를 접촉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도 나왔다. 판사 출신인 이정렬 변호사는 KBS 라디오에 출연해 “이 부장판사가 양 전 대법원장의 심복이라는 것은 법원 내에서 거의 다 알고 있다”며 “양 전 대법원장이 이 부장판사한테 나중에 법정에선 (조작했다고) 그렇게 진술하라고 압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게 바로 증거 인멸의 우려가 된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었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도 두 사람의 수첩이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나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수첩, 다른 하나는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이었다. 안 전 수석의 수첩에 대해 당시 검찰과 박영수 특검팀은 ‘사초’라고 표현했다. 사초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작성된 국정 기록문서를 의미한다. 안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2년간 수첩 63권에 나눠 깨알같이 기록했고, 이는 나중에 박 전 대통령의 직권남용 혐의와 관련한 주요 근거 자료가 됐다.

김 전 수석의 비망록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내용이 날짜별로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2015년 ‘정윤회 문건’ 사태로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갈등을 겪고 청와대를 나온 김 전 수석은 이듬해 8월 간암으로 별세했다. 당시 김 전 수석의 노모는 아들이 남긴 비망록을 방 맨 안쪽 서랍에 두고 아들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 봤다고 한다. 김 전 수석의 노모는 “억울한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겠다”며 이를 언론에 공개했고, 이는 국정농단 수사의 결정적인 실마리가 됐다.

김기정·정진호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