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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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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호 29면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모두 대동소이하다. 잘 안 다스려지는 나라는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통치 불가능(ungovernable)’하다.

우리 모델이던 유럽 다당제·내각제 #미 양당제·대통령중심제 모두 위기 #미·유럽 모두 민족주의 컴백이 변수 #권위있는 제도·정부가 위기탈출 핵심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가 쓴 『안나 카레니나』(1878)의 첫 문장인 “모든 행복한 가정은 대동소이하다. 모든 불행한 가정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불행하다”를 패러디한 말이다. 다스리기 힘든 나라에 사는 국민·시민·유권자는 불행한 가정의 식구처럼 불행하다.

인류 역사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나라가 등장했다. 다스릴 수 없는 나라는 결국 망했다. 하지만 ‘통치불가능한(ungovernable)’이라는 형용사는 1670년대에 처음 등장했다. 통치불가능성(ungovernability)은 1930년대 유럽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 민주주의는 빈사상태였다. 독일·이탈리아 등 상당수 국가가 파시즘이라는 극우 전체주의를 통치불능 해결책으로 삼았다. 다른 나라들도 유혹에 흔들렸다.

경제에 호황·불황 사이클이 있듯이 정치에도 사이클이 있다. 1970년대 민주주의는 ‘정치 불황’과 대면했다. 1975년 미셸 크로지어, 새뮤얼 헌팅턴, 조지 와타누키 공저인 『민주주의의 위기』가 통치불가능성의 문제를 경고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과잉(excess of democracy)’이 통치를 위협한다며 정부 제도의 위상과 권위를 복원할 것을 주문했다.

『민주주의의 위기』 출간 이후 학계·언론계가 심심찮게 통치불가능성을 정국 분석하는데 동원했다. 2019년 유럽과 미국의 정치 위기도 통치불가능성 개념을 불러내 설명하고 있다.

다스리기 어려움의 양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제각각이다. 불행한 가정의 불행 원인이 다양한 것처럼. 하지만 불행한 정치도 공통분모가 있다. 유럽 전체로 보면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의 부상이 문제다. 중도좌파·중도우파 민주주의 정당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독일·스웨덴·네덜란드 등 상당수 나라가 연립 내각 구성에 진땀을 흘렸다. 1930년대 전체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은 극우 정당들을 기성 정당들이 외면하기 힘든 상황이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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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불가능성 테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대표 사례로 든다. 영국은 브렉시트(Brexit)가 문제다.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사진)나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shutdown, 일시적 업무정지)이 대표적인 통치불능 사례로 지목된다. 반대파가 보기에는 트럼프 자체가 미국의 통치불능성을 상징한다. 반대파는 트럼프가 에피소드가 아니라 장기 트렌드가 될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통치불능 상황은 ‘유럽식 의원내각제 다당제가 좋으냐’ ‘미국식 대통령중심제 양당제가 좋으냐’는 논의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양쪽 다 무기력하다. 유럽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지나치게 많아 연립정부 구성이 힘들다. 미국 양당제는 민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가운데 정치 양극화를 부추긴다.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모두 대동소이하다. 제도가 굳건하다. 부패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한 나라들이다. 정부 정책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잘 안 다스려지는 나라 또한 대동소이하다. 세계화·이민·다문화주의의 순기능에 취한 나머지 그 역기능에 신음하는 국민·유권자를 외면하고 있다. 탈산업화(deindustrialization)를 방치했다. 산업정책이 불충분하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기에 디지털 혐오 문화를 방치하고 있다. 상당수 통치불능 국가의 지도자는 고집이 세다. 국제 언론이 지목하는 대표적인 고집센 지도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다.

통치불능성 주장에는 물론 과장도 섞여 있을 것이다. (정치의 수사에서는 과장이 기본인 게 아닐까.) 망할 것 망할 것 같으면서도 잘 안 망하는 게 회사다. 국가는 더욱 잘 안 망한다. 회사보다 장수한다. 하지만 통치불능성을 해결 못 하는 나라는 결국 망한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통치불능성은 망국의 징조가 아니라, 정치 재배열의 징조일 수도 있다.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되돌아왔다. 미국에서도 민족주의가 부상하는 가운데 유럽과 달리 무시되던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라는 이름으로 명함을 내밀고 있다.

우리가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던 미국과 유럽 자체가 통치불능의 늪에 빠져있다. 더는 유럽과 미국은 우리를 위한 해결책의 보고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따라잡다 보니 어느덧 서구는 우리 앞이 아니라 옆에 있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비슷한 수준이다. 정치권 공멸에 직면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새로운 길을 세계에 제시해야 한다.

김환영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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