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성사 등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감돌면서 12년 전 중단된 '북한 지역 우리밀밭 가꾸기 사업'을 다시 추진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산 밀 농가와 수매 단체들 사이에서는 "통일 비용을 줄이고, 남북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고 문제로 남한 밀 산업도 위기인데 북한까지 걱정하는 건 시기상조"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아 실제 사업이 재개될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다.
2005년 '우리밀밭 가꾸기' 재추진 목소리 #남한서 가져간 밀 종자 1t 금강산서 재배 #핵실험 후 중단…남북 화해 무드서 수면위 #우리밀농협 등 "통일 비용 줄여 남북 윈윈" #일부선 "재고 넘쳐 남한 밀 산업도 위기" 반대
30일 밀 산업계에 따르면 국내 민간단체인 (사)통일농수산사업단과 (사)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북한 지역 우리밀밭 가꾸기 사업'을 추진했다. 남측에서 가져간 국산 밀 종자 1t을 북한 땅에 뿌려 재배하는 사업이다. 2005년 10월 파종해 2006년 6월 수확하는 게 사업의 골자다.
남북은 2005년 10월 상순께 금강산 아래 북고성군 삼일포농장에 두 개의 밀밭을 만들었다. 하나는 1000평(3300㎡) 규모의 '밀 전시포'로 금강밀·올그루밀·조은밀 종자를 심었다. 전시포 주변 1만5000평(5만㎡)에는 '금강밀 증식포'를 꾸몄다. 전시포는 어떤 밀 품종이 북한 땅에서 잘 자라는지 확인하기 위한 '적응성 테스트용'이고, 증식포는 금강밀을 보급용으로 대량 생산하는 게 목적이었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당시 출장 보고서에 따르면 남측 관계자들은 각각 2005년 9월 28~30일, 2006년 5월 17~19일 두 차례 북한 삼일포농장을 방문했다. 각각 밀 파종 및 수확을 앞두고 북측 관계자들과 협의하기 위해서다.
두 개의 보고서에는 북한에 심은 밀 생육 상황과 남북 협의 내용 등이 구체적으로 담겼다. 2005년 9월 작성된 보고서에는 "(북측 관계자들이) 밀 재배에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숙기(성숙해 가는 기간)와 수량성(생산량)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고 적혀 있다. 2006년 5월 보고서에는 "금후 기상 상태만 이상이 없다면 평년 작황을 상회할 것"이라고 기록됐다.
이들 단체는 북한에서 밀이 잘 자라는 모습까지 직접 눈으로 봤지만, 수확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남북 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사업이 전면 중단돼서다.
올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사상 최초로 북미정상회담까지 이뤄지면서 그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북한 밀밭 가꾸기 사업이 남북 경제 협력 모델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에 도로·철도·항만 등 인프라 구축에만 천문학적 비용이 예상되는데, 그 전에 북한이 식량 자립 기반을 갖추도록 돕자는 취지다.
찬성 측에 따르면 북한은 쌀이 주식이긴 하지만 추위가 심하고 산악 지대가 많아 밀 비중이 높다. 하지만 해방 이후 밀 종자 개량이 안 된 데다 비료 발달도 더뎌 같은 면적에서 밀을 재배해도 수확량은 남한의 절반도 못 미친다고 한다. 밀 종자도 중국산이 대부분이다. 반면 남한은 그간 육종한 밀 품종만 50여 가지다.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 천익출(71) 조합장은 "남한에서 개량한 밀 종자를 북한에 주고 북측이 자급자족하게 돕는 것은 식량 안보 차원에서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밀조합은 전국 밀 농가 4000여 곳 중 2000여 곳과 계약 재배를 하는 국내 최대 밀 수매 단체다. 천 조합장은 "현재 국내 밀 시장은 수입 밀이 99% 독점하는 구조"라며 "통일까지 생각하면 남북 밀밭 면적이 늘어야 국산 밀의 자급률도 오른다"고 했다. 북한의 토종 밀 종자와 남한의 종자를 교배하면 품종이 다양해지고 자생성 강한 신품종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국산 밀을 생산·가공·유통하는 구례우리밀가공공장 최성호(76) 대표는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면 통일 비용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 대표는 "기계화된 남한에선 밀 같은 식량을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고, 북한은 광물 자원이 풍부하다"며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면 양쪽 모두가 이익"이라고 했다.
이에 반대 측은 "국산 밀 산업의 안정화가 먼저"라며 맞선다. 실제 정부는 최근 내년도 밀 수매·비축 예산으로 100억원을 새로 편성했다. 익명을 원한 밀 산업 종사자는 "재고 밀이 넘쳐 남한 농민들도 죽게 생겼는데 북한에 밀밭을 가꾸자는 주장은 너무 한가한 소리"라고 지적했다.
현재 통일부 등 정부 내부에서는 해당 사업에 대한 재개 검토나 논의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근본적으로 유엔의 대북 제재 국면에서 현실화 가능성이 낮다는 의견도 있다. 최근 국산 밀 재고 문제가 심각해지자 쌀과 함께 밀 원곡을 북한에 구호 식량으로 보내자는 주장도 있으나, 단기 처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태완(53) 우리밀농협 상무는 "통일은 먼 미래가 아니라 코앞에 닥친 문제"라며 "북한에 우리밀밭을 만드는 사업은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지금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다.
광주광역시=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