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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직격 인터뷰

‘남자는 국가, 여자는 가정’ 이분법 깨야 성평등 가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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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사회적 돌봄으로 혐오와 적대가 들끓는 우리사회의 비극적 상황을 끝내야 한다“는 조한혜정 교수. 그는 각 지역 육아공동체, 할머니 학교 등을 통해 ‘사회적 돌봄’의 힘을 확인하고 있다. [양성희 기자]

’사회적 돌봄으로 혐오와 적대가 들끓는 우리사회의 비극적 상황을 끝내야 한다“는 조한혜정 교수. 그는 각 지역 육아공동체, 할머니 학교 등을 통해 ‘사회적 돌봄’의 힘을 확인하고 있다. [양성희 기자]

미투에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혜화역 시위까지, 일 년 내내 페미니즘 이슈가 들끓었다. 한국 사회의 여전한 성차별, 성폭력의 민낯이 드러났다. 그 중심에 20대 영 페미니스트들이 섰고, 여혐 대 남혐 성 대결 구도가 형성되기도 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1세대 페미니스트이자 청년·공동체 문화, 대안교육에 관심을 가져온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70)를 만났다. 그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억압인 가부장제가 여전히 공고하고, 여성은 2등 시민임을 확인한 한 해”라고 돌아봤다. 또 “지금 젠더 갈등은 분단 갈등보다 심각한 사회문제”라며 “제2의 건국에 준하는 국가개조 차원의 젠더정책”을 주문했다. “돌봄과 배려, 호혜가 사라져 혐오와 적대가 가득한 한국사회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깊은 우려도 쏟아냈다. 인터뷰는, 그가 정년퇴직 후 서울과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제주도의 한 카페에서 했다.

올해 페미니즘의 메시지는 #폭력적 삶을 멈추라는 것과 #여성 국민 받아들이라는 것 #모든 세대에게 성찰 요구해 #젠더 갈등, 분단 갈등보다 심각 #일상 속 돌봄의 파탄이 혐오로 #국가 개조 차원 젠더정책 필요 #여가부가 핵심적 역할 해내야

숨 가쁜 한 해를 보내는 소회를 듣고 싶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한국사회가 병적인 상태라는 것도 드러났다. 1919년 3.1운동의 유관순을 필두로 여성들이 공공 영역에 나온 지 100년이다. 70, 80년대 노동권을 놓고 두 번째 여성운동이 있었고, 이후 한국사회가 여성 신참자를 받아들이며 공적 영역이 합리화되고 바뀌어야 했는데 그게 안 됐다. 올해의 메시지는 두 개다. 폭력적인 삶을 멈추라는 것과 여성을 국민으로 받아들이라는 것. 일제 이후 폭력구조를 토대로 한 체제를 살아왔으나 더는 폭력을 참지 않겠다는 감수성이 여성과 젊은 세대에 확산됐다. 이건 성폭력뿐 아니라 각종 갑질 고발에서도 드러났다. 돌봄과 배려, 환대라는 감수성이 사라지고 혐오와 적대가 들끓고 있는 비극적 상황도 끝내야 한다.”
‘여자에게 국가는 없다’가 올해를 대표하는 구호 아닐까.
“서지현 검사의 미투는, 엘리트 검사조차도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변태적 가부장제의 일단을 드러냈다. 혜화역의 여성들도 국가가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국가는 여자를 경제 역군으로 이용한 것 외에 엄마 역할을 지원하지 않았고, 성적 주체로서 경험하는 폭력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다. 여성은 여성일 뿐 여성국민은 없었다는 얘기다.”
사실 여성 문제는 남성 문제이기도 한데.
“남자가 지배하는 국가, 여자가 지배하는 가정. 이 이분법이 변하지 않은 채 유지돼온 부작용이 크다. 여자는 공적 영역에서 배제·무시당하고 남자는 가정·사적 영역에서 그렇다. 사회에 나간 여자들은 개인적으로 눈치 보면서 직장 생활을 하고, 남자들은 제대로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집에서 눈칫밥을 먹게 된다. 어린 소년들이 여혐 현상을 보이는 것도 사적 영역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소외를 느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공적인 존재이자 가정적·사적인 존재이고 이 둘의 균형을 누리며 자기 분열적 삶을 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50%의 젊은이들이 결혼을 안 해도 된다는 조사가 나왔는데 이 역시 이런 자기 분열을 강요하는 이분법적 구조와 관련이 있다. 정치 부패와 입시 교육체제가 바뀌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8‘페미니즘 이슈’무슨 일 있었나

2018‘페미니즘 이슈’무슨 일 있었나

그간 여성운동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싶기도 하다. 여성의 공직 진출, 호주제 폐지(2005) 이후엔 동력을 잃었던 것 같다.
“70, 80년대 2차 여성운동은 여성의 사회참여에 맞춰졌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었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바람 속에서 개별적인 생존 노력이 강조됐고, 그건 여성도, 여성운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영역에서 축복받는 1호 여성들이 나왔지만, 그건 눈에 띄는 소수였을 뿐 다수는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직장에서도 룸살롱 문화 등 남성연대에 끼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고용평등법이 있지만 여성이 과장 이상으로 못 올라가는 일이 벌어졌다. 거기에 젊은 여성들이 몰카가 무서워서 화장실도 못 가고, 남자친구가 리벤지 포르노를 유포해서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는 끔찍한 상황이 된 거다.”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이 아주 크다.
“지금 20대는 성적으로 자유롭고 성애의 개념이 이전 세대와 다르다. 친밀한 남녀 사이에서 페미니즘 이슈가 발생하고 있는데, 함께 봐야 할 게 많다. 전 사회의 폭력화, 상대적 박탈감, 억울 정서, 혐오와 적대, 희망이 없어진 청소년들의 방황, 거기에 온라인에 부유하는 고립된 남자들의 패거리 문화. 그 남자문화가 화장실 몰카, 리벤지 포르노 불법촬영, 가짜뉴스 악플달기, 초딩의 일베화 등이다. 뒤늦게 등장한 여성시민들, 안전에 초민감한 여성 민초들이 가부장적 연대와 변태국가적 성격을 간파하고 나선 상황이다.”
20대 남녀의 성대립 양상이 심하다. 서로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삼포세대, 금수저 담론 아래서 20대는 피해자다. 그 피해의 원인을 친한 사람에게 돌리고 있는 거다. 20대 여성에게는 가부장제의 피해만 보인다. 20대 남성은 억울하다. 오염된 일상의 감정적 상처가 너무 크다. 결혼 외에 선택지가 다양한 여성과 달리 남성은 오직 결혼해 가장이 되는 하나의 길만 제시되는데 취업이 안되는 경제구조 아래에서는 그 자체로 이미 실패한 인간이 된다. 독박육아를 한 여성이 자식에게 자신의 성취를 투사하며 성취를 강요하는 폭력적 모성이 되는 문제도 있다. 학교에 남교사가 없는 것도 문제다. 시험 성적순으로 교사를 뽑으니 그렇게 되는 것인데, 이를테면 남학생들이 왜 그렇게 온라인 게임에 빠지는지, 어떤 나이에 성적 판타지를 갖게 되는지, 어떻게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지, 공부만 한 범생이 여교사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지금 젠더 갈등은 결국 남녀 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문제라는 뜻이다.
“식민지 시대로부터 잡은 근대화의 틀을 바꿨어야 했는데 못 했다. 우리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응원을 통해, 과거 같은 동원된 국민이 아니라 개인성에서 출발하는 시민의 성장을 보았다. 그런데 국제 금융위기가 왔고, 기존의 경제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경고 아래 자율적 시민 중심으로 체제전환을 하는 대신 국가 주도와 가족 단위로 뭉치는 식으로 퇴행해버렸다. 청년 남자들은 인터넷 벤처 등으로 나갔지만 상당수가 주식과 온라인 게임으로 시간과 돈을 벌고 쓰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남자로서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사라졌다. 후기 근대로 접어들면 가족이건 학교건 회사건 국가건 조직 원리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뭉치면 사는 것이 아니라 헤쳐야 사는 것, 획일성과 동질성의 복제가 아니라 다양성의 조직화로 전환해야 한다. 소통, 협치, 포용, 돌봄,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루는 성숙한 개인성의 원리를 살려야 하는데 그걸 못했다.”
사회적 돌봄을 강조하는데.
“일상 속 돌봄이 파탄 나면, 그 사회는 괴물이 된다. 서로 존중하고 돌보고 사는 사회적 관계가 깨지기 때문이다. 북유럽에서는 6학년만 되도 1학년이나 유치원생 동생들을 돌보며 놀아준다. 20세가 되면 모두 사회 재난 현장에서 누군가를 구호하는 제도가 있다. 누군가를 돌보면서 배려와 환대, 사랑 같은 사회적 관계의 기본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저출산을 우려하는데 지금 태어난 모든 아이를 괴물이 되지 않게 잘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요즘은 초등생들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고 하고, 10대들이 자해를 한다. 국가와 가족만으로는 안된다. 결핍 가족이 얼마나 많은가. 국가와 가족의 중간에서 시민들이 공동육아와 비슷한 형태의, 예전의 친척이나 이웃·마을 공동체 같은 사회적 돌봄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돌봄 체계 안에서 시민들은 안전함을 느끼고, 자율적 시민으로 키워진다. 자발성과 창의성, 협력도 가능해진다. 기존의 남성중심적 국가나 ‘정상가족’ 관점에선 풀 수 없었던 문제 해결도 가능해진다.”
사회적 돌봄 체계란 곧 복지 시스템을 의미할텐데.
“현재 복지정책은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이다. 가령 서울시의 경우, 오세훈 시장 때부터  자율적 시민이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금으로 정치가가 선심 쓴다. 그러면 국민들은 돈 타내려고 끝없이 요구하고 자기가 적게 가졌다고 불평하는 ‘진상 고객’이 된다. 그러나 국민, 시민은 고객으로 대상화될 존재가 아니라 주인이다. 정부는 남의 돈으로 선심쓰는 서비스 기관이 아니다. 공론화하고 합의에 도달하는 능력을 가진 시민들이 사회를 만드는 곳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어떻게 지원할 지를 묻고 확산하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행정이 할 일이다. 공무원도, 그저 국민을 관리하는 공무원이 아니라 시민과 함께 사회를 살리는 지원자 역할을 하는 ‘시민공무원’이 늘어나야 한다."
앞으로 페미니즘 트렌드는 어떻게 흘러갈까.
“내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폭력적으로 살지 말자, 지금처럼 살지 말자는 메시지에 동참하는 100만 명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남자만 문제가 아니고 나 같은 교수를 포함해 모든 세대가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한다. 지난 100년의 역사가 강요한 ‘남자처럼 보기’ 대신 여자처럼, 아이처럼, 청소년처럼 보지 않으면 모두가 범죄자, 가해자가 된다. 여성운동도 그간 ‘~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며 남자처럼 된 면이 많은데, 앞으로는 ‘~를 향한 해방’이어야 한다. 상생, 돌봄, 소통이 가능한 남녀 모두가 사회적 모성, 환대의 몸을 가진 사회를 향한 해방운동을 벌여야 한다.”
여가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초미니 힘없는 여가부의 위상이 한국에서 여성의 위치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 때 없어질 뻔한 여가부를 여성계가 나서서 간신히 살렸다. 이후 연명하는 수준인데, 여가부 직원들 고군분투하시지만 군소 부처로 홀대받는 것 볼 때마다 그때 없어졌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제 제대로 비전을 세우고, 국가 개조의 핵심이 돼 제 역할을 하기 바란다. 건물을 짓는 토건국가에서 사람을 키우는 돌봄국가로의 전환이다.”  

조한혜정은…

미국 UCLA 문화인류학 박사. 하자센터장. 1981~2013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로 일했다. 83년 여성주의 동인 ‘또 하나의 문화’를 통해 지식인 여성운동을 주도했다. 99년 서울시립 청소년직업센터인 ‘하자센터’를 설립했고 이후 마을공동체, 사회적 기업 운동 등을 통해 한국의 시민사회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길남 카이스트 명예교수가 남편이다. 책으로 『성찰적 근대성과 페미니즘』 『선망국의 시간』 등이 있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