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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직격 인터뷰

문정인 "민족 교류는 제재 예외 가능···비핵화 땐 완화 늘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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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통일·외교·안보 정책 조언하는 문정인 대통령 특보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지난 2일 "남북 간 경제교류에 대한 예외를 인정 받아 이를 점진적으로 추진하면 북한 비핵화에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정부서울청사 창성동별관 사무실에 이뤄졌다. 김경록 기자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지난 2일 "남북 간 경제교류에 대한 예외를 인정 받아 이를 점진적으로 추진하면 북한 비핵화에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정부서울청사 창성동별관 사무실에 이뤄졌다. 김경록 기자

새해 들면서 한동안 멈췄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엔진이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온건한 신년사와 함께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친서를 보내 분위기를 반전시킨 까닭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과 서울 답방의 기대가 높아지면서 실질적 비핵화가 이뤄질 수도 있다는 낙관론이 나온다. 반면 케케묵은 평화공세일 뿐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현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나.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평가받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를 지난 2일 만났다. 문 특보는 특히 점진적 남북 경제교류를 통한 비핵화 방안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우선 "남북 경제교류는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인만큼 유엔 제재의 예외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제재 완화의 폭을 남북한 간으로 좁힌 뒤 점진적인 경제교류를 시도하고 북한이 비핵화를 행동으로 보여준다면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신년사, 미국과 개선 의지 #제재 늦췄다지만 북 입장에선 강화 #김정은, 주한미군 역할에 긍정적 #합리적인 트럼프, 판 깨지 않을 것 #남북관계는 민족 내부의 특수 문제 #유엔 대북 결의의 예외 될 수 있어 #북 비핵화하면 제재 완화 늘려야 #실질적 조치 없을 때 강화하면 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일 보도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일 보도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를 본 소감은.
"지난해 신년사의 연장선에 있는 예측 가능한 메시지로 자립경제와 자력갱생, 그리고 인민 제일주의가 키워드였다. 북한은 단체를 중시하는 사회인데 이번에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또 인민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제도 개혁과 함께 군수산업조차 인민 경제에 도움이 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 안보 분야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남북관계의 대전환을 모델로 삼아 북·미도 잘 해보자’는 대목이다. 남북관계는 신뢰가 구축돼 본궤도 올랐으니 이를 모범 삼아 북·미 문제도 개선하자는 메시지로 읽힌다."
- ‘미국이 호응을 안 하면 다른 길을 가겠다’고 했는데.
"‘부득이 할 수 없는 그런 경우가 온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지 않나. 이는 강한 수동형 표현이다. 당장 뭘 하겠다는 게 아니라 상황이 달라지면 새로운 길을 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 사이에선 새로운 길이 뭔지를 놓고 논의가 되고 있다. 낡은 병진 노선인지, 아니면 핵무기 실전 배치 또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인지, 여러 의견이 있다. 분명한 건 지난해 신년사에 나온 ‘내 책상 위에 핵 단추가 있다’는 식의 초강경 노선은 아니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 김정은 답방도 안 됐고 북·미 대화도 지지부진하다. 타개책은.

"그간 미국이 생각한 방식은 스티브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최선희 외무성 부상 간 실무회담에서 기본 작업을 하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고위급 회담을 하고, 이후 양쪽 정상이 만나는 상향식이었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김정은 위원장은 ‘성과주의’를 강조한다. 실제로 지난해 9월 평양에서 만난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얼마나 어렵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더는 퇴행은 없습니다. 성과를 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은 완전 비핵화 이후 제재완화를 고집하고 있다. 그 밑에는 '너희는 죄를 지었으니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 깔려있다. 그러니 북한 실무자들로서는 협상해봐야 안 될 게 뻔하다. 협상에 실패할 경우 김 위원장이 강조하는 성과주의에 반하게 되고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실무협상은 안 되고 정상 대 정상 간 타협만이 가능한 구도다."
 - 북·미 모두 ‘너부터 양보하라’는 셈인데 해결 방안은.
"이제는 ‘양보가 있는 말 대 말’로 돌아야 한다. 폼페이오의 3차 방북 때 핵 신고 사찰 얘기가 나왔다. 당시 북측에서는 서로 신뢰하지 않는데 어떻게 리스트를 만들 수 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미 정보당국은 북한에 60~65개의 핵탄두가 있다고 한다. 북한이 이보다 적게 신고하면 미국은 '속임수를 쓴다'며 판을 깰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회복이 어려우니 먼저 조율을 해야 한다고 북측 고위당국자가 주장했다. 그러니 북한이 불가역적 단계까지 비핵화를 하면 부분적인 제재완화를 해줘야 한다."
- 최근 미국이 인도적 대북 지원과 미국인의 북한 여행 등을 허용했다. 나름대로 성의 표시 아닌가.
 "북한 주민을 위해 인도적 사업을 하는 재미교포들이 폼페이오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미 정부에 로비를 했다고 들었다. 결국 이번 조치는 이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은 우리 정부가 워킹그룹까지 만들며 요청해 허용받은 성과물이다. 미국은 오히려 인권 위반으로 최선희 등을 제재 리스트에 올렸다. 북의 입장에선 제재가 강화된 것이다. 핵·미사일 도발도 안 했고 인권문제도 없었는데 미국이 더 강성으로 나왔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수 있다."
- 북한이 지연 작전을 쓴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 정부 인사가 워싱턴에 가서 '북한이 분명히 비핵화한다고 했다'고 하면 '어떻게 믿느냐'고 한다. 과거 북한이 '핵무장하겠다'고 할 때는 '대화하자'고 했다. 이제 북한 지도자가 비핵화하겠다고 하는데 그건 못 믿겠다고 하는 건 이해가 안 간다. 비핵화하겠다고 하면 이를 받아서 협상을 통해 풀어야 하지 않나. 비핵화 안 하겠다고 해도 대화로 비핵화를 끌어내는 게 외교다."
- 현시점에서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북·미 양측을 설득해야 한다.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 영변 핵시설 등 세 곳을 폐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중 풍계리에서만 행동을 보였다. 그러니 추가적 행동이 이뤄지게 우리가 유도해야 한다. 미국 측에서는 나머지 곳에서 폐기가 이뤄지면 당연히 제재 완화를 해줘야 한다. 당장 핵탄두 폐기는 어렵다. 대신 핵물질 생산시설에 대한 협상이 가능하다. 플라토늄과 고농축 우라늄을 만드는 곳은 군사시설도 아니어서 신고와 사찰을 통한 검증이 가능하다. 이 문제에 북한이 협조적으로 나오면 미국이 제재 완화를 해줄 수 있을 텐데 그저 '완전한 비핵화'만 반복하고 있다. 미국이 각론이 아닌 총론만 말하고 있어 답답하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 김정은 서울 답방은 언제쯤 될까
"트럼프 대통령이 2월 전에 회담하겠다고 했으니 빨리 추진해야 한다. 이 만남 때 문 대통령도 참여해 종전선언을 하는 게 정부가 가장 바라는 안이다. 이후 김 위원장이 서울로 답방해 제재완화와 관련된 각론을 얘기할 수 있다."
- 대북 유엔 안보리 결의가 있는 데 제재 완화가 되나.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부터 이어져 온 정신이지만 남북관계는 민족 내부의 특수문제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 행보를 보인다는 전제 아래 안보리 결의를 신축적으로 해석해 남북 경제협력을 예외로 할 수 있다고 본다."
- 그런 방안을 검토하는 배경은.
"미국 입장에선 유엔 제재 완화에 전 세계, 특히 중국까지 동참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압박 효과가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완화 범위를 좁혀 남북 간의 점진적 경제 협력으로 국한하는 방안을 실험적으로 시도해 볼 만하다. 이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가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제재 완화 범위를 늘리면 된다. 만약 비핵화를 향한 북한의 실질적 조치가 없다면 유엔 제재를 다시 강화하면 그뿐이다. 물론 유엔의 협력이 필요하다. 우리 정부로서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이용해 북한을 잘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관성과 타성에 젖어서 생각하면 안 된다."
- 김 위원장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에 대해 전향적 입장을 밝혔다.
"그는 ‘아무런 전제조건, 대가 없이’라고 했다. 금강산 관광의 경우 북한은 관련 재산을 몰수하며 이를 해제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했었다.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란 그걸 없애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다음으로 ‘대가 없이’란 표현이 논란이 될 수 있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폐쇄로 누적된 손실이 컸다. 이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해주지 않더라도 재개할 생각이 있다는 뜻일 수 있다."
- 남북 관계를 위해 어느 단계가 되면 주한미군을 줄이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나.
"문 대통령 입장은 분명하다. 주한미군이나 한·미동맹은 주권국가인 한·미가 상의해 합의한 사항이므로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9월 초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이 평양에 갔을 때 종전선언 논의에서 이 문제가 나왔다. 당시 두 사람은 김 위원장에게 이런 입장을 밝혔고 양해를 구했다. 김 위원장은 이에 동의한다며 '당장 주한미군 빼서 득 볼 사람은 없다'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주한미군이 없으면 한반도의 전략적 불안정이 커져 북한으로서도 도움이 될 게 없다. 앞서 김일성·김정일이 그랬듯, 김 위원장도 한·미 연합군사훈련이나 전략적 무기 반입은 거부하지만, 주한미군의 지정학적 역할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믿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친서를 받았다며 들어 보이고 있다.[유튜브 영상 촬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친서를 받았다며 들어 보이고 있다.[유튜브 영상 촬영]

- 미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하는 2월 전에 트럼프가 북핵 문제에 대한 결단을 내릴 거란 분석이 있다.
"트럼프의 정치적 셈법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 다음 미 대선이 내년 11월이니 벌써 비핵화와 관련한 성과를 내면 선거 때는 효력이 없어질 게 뻔해 서두르지 않을 거란 전망이 있다. 심지어 2020년에는 강경한 방법을 통해 북한 문제를 풀려는 것 아니냐는 예상도 있다. 협상을 통해 비핵화에 성공하든, 잘 안돼서 강경 노선으로 가도 트럼프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다. 따라서 일단 내년으로 연기할 거로 보는 이들이 많은 건 틀림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부터 잘 다듬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않으면 앞으로의 상황은 훨씬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모든 게 올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셈이다. 대선 3~4개월 전인 내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북한 비핵화가 이뤄진다면 트럼프로서는 엄청난 정치적 성과가 된다. 트럼프는 충동적인 성격이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합리적인 충동적 성격이므로 판을 깨진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2019년은 그리 나쁜 해가 되진 않을 거로 예상한다."


 ☞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68)는 문재인 대통령의 실세 브레인으로 꼽힌다. 그의 구상이 남북관계와 4강 외교의 기본 틀까지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다. 연세대에서 오래 교편을 잡은 문 특보는 대표적인 진보 성향의 국제정치 학자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에도 통일·외교 정책에 깊숙이 간여했다. 연세대 철학과를 나와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석·박사를 땄다.

남정호 논설위원  취재 지원=박규민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