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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아닌 정부 주도, 한국판 ‘에꼴 42’ 성공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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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프랑스 파리에 있는 정보기술(IT) 인재 양성기관 ‘에꼴42’. 이 학교는 순수 민간 교육기관으로 학비·교수·졸업장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사진 에꼴42]

프랑스 파리에 있는 정보기술(IT) 인재 양성기관 ‘에꼴42’. 이 학교는 순수 민간 교육기관으로 학비·교수·졸업장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사진 에꼴42]

#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언덕 너머에 있는 정보기술(IT) 인재 전문 양성기관 ‘에꼴42’. 이 학교엔 학비와 교수, 졸업장이 없다. 정해진 학기도 없고 출석 체크도 하지 않는다. 24시간 동안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도 된다. 학생들은 역할 수행 게임(RPG)에 접속해 레벨을 올리듯 자체 개발한 교육용 클라우드에 접속해 인공지능·사물인터넷 등 원하는 IT를 연마하면 된다. 이곳은 일부러 정부 자금 지원도 거부했다. 지난해 이 곳에서 중앙일보와 만난 자비에 니엘 회장은 “정부 지원을 받아 공교육으로 편입되면 혁신적인 교육 실험을 할 수 없게 된다”며 “올랑드 전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도 여기저기서 잠을 자는 학생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교수·학위·학비 없는 프랑스 학교 #민간자본 주도 IT 혁신교육 실험 #한국은 정부 주도로 국비 지원 #IT 생태계도 규제로 묶인 상태 #여건 다른데 형식만 벤치마킹

# 지난해 4월 문을 연 서울대 4차산업혁명아카데미. 빅데이터 플랫폼·빅데이터 분석·인공지능·핀테크 등 4개 과정을 운영했던 이곳은 조만간 핀테크를 제외한 나머지 과정 폐쇄를 고민 중이다. 직업훈련원에 적용되는 고용노동부 규정이 이 학교에도 적용되면서 새로운 교육 실험이 번번이 좌절된 탓이다. 출석 체크 없는 학교를 만들려고 해도 국비 지원 기관이다 보니 학생들의 출·결 기록을 남겨야 한다. 학생 수보다 많은 교재가 발간되면 인쇄비 사용에 대한 회계 감사가 들어온다. 아카데미 설립에 참여한 한 교육자는 “양심에 맡겨도 될 일을 정부가 일일이 감독을 하니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26일 미래형 소프트웨어 인재 양성 기관으로 한국형 ‘에꼴42’ 설립 계획을 발표했지만, IT 전문가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설립 취지는 좋다. 하지만 인재들이 아이디어를 펼칠 신기술 생태계 전반에 대한 규제부터 해결해야 교육 기관 설립도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부 주도로 설립되는 ‘이노베이션아카데미’는 ‘에꼴42’의 특징을 상당수 벤치마킹했다. 획일화한 교재도, 교수도 없다. 전액 국비 지원으로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 전공·경력·국적을 묻지 않고 입학할 수 있고 과정을 마쳐도 학위를 주지 않는다. 교육 내용도 인공지능·빅데이터 등 IT 기업이 필요로 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선진국 성공 사례를 본뜬다고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태생부터 차이가 크다 보니, 교육 성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프랑스 ‘에꼴42’와 한국 ‘이노베이션아카데미’ 비교

프랑스 ‘에꼴42’와 한국 ‘이노베이션아카데미’ 비교

‘에꼴42’는 프랑스 제4 이동통신사 ‘프리모바일’의 회장 자비에 니엘이 사비를 털어 설립했다. 기존 사업자들이 과점한 통신 시장에 신생 사업자가 진입하려면 차별화한 IT 서비스가 필요했다. 혁신을 추구하는 신생 이통사와 이를 중심으로 한 모바일 소프트웨어 생태계 속에서 탄생한 것이 에꼴42다. 빠르게 변하는 IT 생태계에 적응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려다 보니 공교육에서 정한 규율과 교수법을 거부하게 됐다.

IT 기업들도 명문대학 졸업장이 아니라 당장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해 낼 코딩 능력을 원했다. ‘국가의 필요’보다는 ‘민간 IT 생태계의 필요’에 맞춰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올리비에 크루제 에꼴42 교무부장은 “에꼴42 교육생 셋 중 한 명은 당장 현장에 투입해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이노베이션아카데미는 정부 주도다. 내년까지 350억원, 2023년까지 1806억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다 보니 당장 국회·감사원 등의 간섭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기존 교육 제도와는 다른 자체 규정을 만들어 민간에 위탁 운영할 방침이다. 그러나 과기정통부 역시 다른 정부기관, 기존 규제와의 충돌을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차상균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장은 “아무리 좋은 취지의 예산도 과거 직업 훈련 위주로 만들어진 규정에 매이게 되면 혁신적인 인재 양성 실험을 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세종=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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