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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親)노동 ‘속도조절’한다더니…실제론 반(反)기업 ‘가속페달’

중앙일보

입력

재계가 내년 경영환경을 흔들 노동 정책과 반(反)기업 입법에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산업계 애로를 경청하고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근로제에 대한 속도 조절을 언급했지만, 달라지지 않은 정부의 행보에 실망감이 크다.

당장 '발등의 불'인 건 최저임금이다. 최저임금이 2년 새 29.1% 인상된 데다, 최저임금 산정에 주휴시간(유급으로 처리하는 휴무시간)까지 포함하면서 내년부터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은 2017년에 비해 부쩍 늘게 된다. 주요 경제단체들이 ‘실제로 일한 시간만 근로시간에 포함하라’는 대법원 판례를 들어 재고를 호소했지만 정부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로시간 및 최저임금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로시간 및 최저임금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년부터 본격 시행하는 '주 52시간 근로제'도 골칫거리다. 정부는 제도 보완을 위해 탄력 근로시간제 단위 기간을 최대 3개월에서 6개월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기간을 늘리려면 근로자 대표와 서면으로 합의해야 하고, 근로일별 근로시간이 기재된 합의서를 작성해야 하는 등 절차가 까다롭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인사 담당 임원은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응하려면 임금이나 근로체계를 손봐야 하는데, 강성 노조와의 합의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며 “노조는 이를 어떻게든 협상에 이용할 것이고, 결국 기업만 부담이 늘어나는 셈”이라고 하소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국내 주요 기업 244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내년도 경영환경의 애로 요인으로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 노동정책 부담을 지목한 비율이 30.3%에 달했다.

정부의 오락가락한 메시지와 행보로 정부에 대한 재계의 불신도 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불과 열흘 전인 17일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노동 현안의 속도조절론을 시사했다. 정부의 산업정책 부재도 질타했다. 공정거래위원장이 49년만에 처음으로 사용자 단체인 한국경영자총연맹(경총)을 방문하는 등 재계 입장을 경청하겠다는 경제 관련 장관들의 움직임도 포착됐다.

문재인 대통령(앞줄 왼쪽 두 번째)이 17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확대경제장관회의에 경제관련 부처 장관 및 청와대 참모진과 함께 입장하며 홍남기(앞줄 왼쪽 세 번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앞줄 왼쪽 두 번째)이 17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확대경제장관회의에 경제관련 부처 장관 및 청와대 참모진과 함께 입장하며 홍남기(앞줄 왼쪽 세 번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특히 ‘경제 원톱’을 자임하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산업 현장을 누비며 “시장 기대와 다른 정책은 현장 목소리를 반영해 보완하겠다”고 여러 번 강조한 터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현장의 목소리에는 귀를 막은 친(親)노동 일변도의 정책이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젠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기업들로선 그간 정부가 던졌던 메시지와 다른 정책 행보에 혼란이 클 것”이라며 “이처럼 최근 드러난 청와대ㆍ정부의 언행 불일치는 국정의 난맥상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으로,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라고 진단했다.

정부와 여당이 내년에 협력이익공유제 법제화, 상법ㆍ공정거래법 개정 등을 밀어붙이면서 대기업 '옥죄기'도 풀린 게 없다. 대ㆍ중소기업이 공동으로 정한 매출ㆍ이익을 달성하면, 대기업이 이익 일부를 중소기업에 나눠주자는 내용의 협력이익공유제에 대해서는 기업의 정상적인 이윤 추구를 제약하는 과잉 입법이라는 반발이 크다.

▶집중투표제 의무화▶감사위원 분리선출▶다중대표소송 등의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과 ▶전속고발제 폐지▶공익법인 의결권 제한 등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기업의 경영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반면 그간 재계에서 요구해온 규제혁신은 제자리걸음이다.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선 빅데이터 산업 관련 규제는 연내 국회 처리가 무산됐고, 원격의료 관련 규제 개혁 법안은 여당 내 일부 의원의 반발로 법안 발의도 못 하고 있다.

‘기업 패싱’ 분위기도 여전하다. 주요 기업인과 정ㆍ관계 인사들이 모여 새해 각오를 다지는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문 대통령은 2년 연속 불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62년 경제계 신년인사회가 시작된 이후 대통령이 임기 첫 신년인사회에 이어 2년 연속 불참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일부 정책에 대해 노선 변경을 시사했는데, 시장이 이를 믿고 갈 수 있도록 구체화한 후속 정책이 이어져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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