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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사랑, 석류 알 깨무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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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전수경 화가

전수경 화가

아무렇지 않고 별난 것도 없다. 삼 년 전 겨울부터 입고 또 입은 흰 스웨터의 보풀이 더 이상 내 어깨를 찌르지 않는다. 처음 입었을 때 나는 예뻐지고 더 젊어지는 줄 알았다. 새 옷을 입는 것으로 예기치 못한 사랑이 행여나 찾아올 것이라 습관처럼 기대도 했다. 이제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고 내 피부처럼 된 지 오래다. 익숙해지는 만큼 감흥은 멀어져 가나 보다.

아침에 석류를 먹다 그 즙이 스웨터에 튀었다. 마치 새하얀 눈밭에 흘린 핏자국 같다. 향긋하고 새콤한 열매가 이렇게 잔인해 뵈다니. 촘촘히 박힌 루비보석 알알들이 벙긋 벌린 껍질 사이로 드러나면 얼마나 탐스러운지 모른다. 하지만 석류는 껍질을 쪼갤 때 그리고 낱알들을 뜯을 때 매번 붉은 즙을 터뜨려 낭패를 안긴다. 예뻐 보여 다가갔더니 앙칼진 성격을 드러내는 못된 꼬마라도 만나는 것 같다.

하지만 마당의 석류를 따다 곱게 내 입에 넣어주시던 할머니의 손은 얼룩 없이 항상 깨끗했다. 그때 내 혓바닥 위의 석류 알은 한동안 터지지 않고 온 입안에 향기를 뿜으며 말랑말랑한 촉감을 일깨우곤 했다. 성급히 다루면 곤경을 안기고 조심스레 다루면 기쁨이 배가되는 것이 석류인 것 같다. 로제티 단테 가브리엘(1828~1882)이 그린 ‘페르세포네’는 석류를 진중하게 다룬다. 석류를 쥔 왼손의 성급함을 오른손이 침착하게 제어하는 모습이다.

로제티, 페르세포네, 캔버스에 유채. 1874.

로제티, 페르세포네, 캔버스에 유채. 1874.

페르세포네는 석류를 먹는 바람에 지하의 세계에 갇히는 운명에 처한 그리스신화의 여신이다. 로제티는 그의 연인을 모델로 이 여신을 그렸다. 풍성하게 구불거리는 머리숱과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실크 주름이 여인을 덮은 채 밝게 빛나는 목덜미를 드러낸다. 이쪽 세계와 상관없이 그녀의 시선은 땅을 향한다.

여인은 성급한 화가의 손길과 키스를 외면한 채 신비한 영역에 속한 모습이다. 향로에서 막 피어오른 향이 곧 모델과 화가 사이에 퍼질 듯하다. 굽이치는 옷 주름들과 머리칼의 윤은 어스름 녘 숲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오래된 나무둥치의 결처럼 미지의 어두움을 이끈다. 이렇듯 로제티는 지하 세계에 오래 갇혀 있다가 밝은 곳으로 갓 나온 여신을 대하듯 사랑하는 연인을 귀하게 환영하고 조심스럽게 아끼는 존재로 묘사한다. 여기에 석류는 사랑의 목표, 사랑의 궁극으로 비친다.

페르세포네는 미술의 역사에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페르세포네를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여신은 석류 대신 삼색기를 들고 혁명의 아이콘으로 변신한다. 뉴욕의 리버티 섬에 우뚝 선 자유의 여신 또한 마찬가지다. 뉴욕항의 여신은 석류 대신 횃불을 든다. 지하 깊숙이 암흑에 갇혔다가 대지 위 광명의 세계로 나온 페르세포네와 석류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에 걸맞은 변화의 상징으로 재탄생해온 셈이다.

고대 지중해와 이집트 문화권에서 석류는 강력한 최음제로 쓰였고 유대인들은 낙원의 생명나무에 석류가 열린다고 믿었다. 열매 주머니 한 곳에 무수한 씨앗이 가득 찬 것을 보고 극동에서 석류는 다산의 상징이 됐다. 석류의 능력은 이렇게 변화와 생산에 관계하는 신비에 모아진다. 이는 곧 여성의 능력이다. 잘 드러나지 않는 작은 움직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탄생하는 일은 여성의 소관이다.

때론 암흑의 땅속에서 여신을 견디게 하고 때론 혁명을 성공시킨 이념의 깃발이 되고 때론 자유의 신대륙을 밝히는 횃불이 되는 석류의 능력을 통해 로제티는 사랑의 원리와 그것을 향유하는 방식을 전하려 한 것 같다. 사랑하는 대상을 소중하게 다루고 교감을 깊게 하는 방식은 터질 것 같은 한 알의 석류 알갱이를 매만지거나 입에 넣어 연습하면 어떨까?

석류의 알갱이를 다급히 터뜨리지 않고 입 안에 두고 음미할 때 페르세포네가 머물렀던 땅속 세계의 맛과 향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번 크리스마스 아침엔 새 스웨터를 입고 탱글탱글한 석류 몇 알을 떼어 지그시 머금고 그 향과 맛을 즐기고 싶다.

전수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