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은 존재를 규정한다.
본인은 스스로 작가라지만, 방송에도 얼굴을 자주 내비친다. 잊을 만할 때면 이슈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적잖은 이들은 그를 정치인이라고 부르길 원한다.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의 유시민 이사장 얘기다. 희한하게도 그 스스로 “정치를 떠났다”고 주장할수록, 그가 정치판에 점점 깊이 발을 담근다고 여기는 이들이 늘어난다.
노무현재단 이사장 자격 팟캐스트 #“넘쳐나는 반지성주의 매주 정리” #보수 우위 유튜브 전장 뛰어들어 #“대선 조사 때 내 이름 넣지 말길”
이번에도 그렇다. 발단은 22일 서울 서대문구 추계예술대에서 열린 ‘노무현 재단 2018 회원의 날’ 행사였다. 유 이사장은 “재단이 팟캐스트를 하나 하기로 했다. 진행은 내가 한다”고 말했다. “폼 잡고 방송 하차하겠다고 해놓고선 시사프로에 다시 나갈 수는 없다”면서다. 다음은 행사 당시 사회자와 유 이사장의 문답 중 일부.
- 처음 공개하는 것 같다.
- 잘못된 사실에 근거해 비방해도 대처할 방법이 없다. 우리 스스로 얘기할 수 있는 매체가 있어야 한다. 국가 정책 이슈들 보도하는 것 보면 반지성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나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정리해줘야 할 것 같다.
- 정치 재개 선언인가.
- ‘유 아무개, 노무현 재단 이사장 맡아서 밑자락 깐 다음 이제 팟캐스트를 한다는 건 정치복귀 몸풀기하는 거다’는 보도가 나올 것 같다. 특단의 조치 준비 중이다. 나를 넣고 여론조사를 하는데, 여론조사 심의위원회라는 국가기관에 ‘여론 조사할 때 넣지 말라는 본인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는 안내문을 보내주는 정도가 법적으로 가능한 최고 형태다.
- 주식시장에서 유시민 테마주가 뜬다.
- 그거 다 사기다. 자기들끼리 돈 가지고 장난치는 거다. 그런데 막을 방법이 없더라. 피곤하다. 그만 좀 괴롭히시라. (웃음)
‘유시민의 팟캐스트’는 이달 초 열렸던 노무현재단 이사회 때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내년도 사업 계획을 논의하면서 유 이사장이 이사회 멤버들에게 유튜브를 활용한 팟캐스트 계획을 보고했다고 한다. 노무현 재단 이사인 이광재 여시재 원장은 “내년이면 노 전 대통령 서거 10주년이기도 해서 정책적인 논쟁이나 토론을 활발히 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유 이사장이 뛰어들겠다는 유튜브는 가장 뜨거운 전장(戰場)이다. 기존 언론과 달리 ‘심의 규정’이나 ‘언론 중재’라는 게 없다. 명예훼손 등에 저촉만 안 되면 된다.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들기 일쑤다.
특히 현재 유튜브의 정치 지형은 보수 우위다. 이를 의식한 듯 유 이사장도 “유튜브가 대세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다 한 번 정복해볼까 싶다”고 말했다.
앞서 그는 이미 현안에 목소리를 내면서 스스로 ‘반(半) 정치인’이 되기도 했다. 가상화폐가 뜨거웠던 1월, 그는 “전 세계 사기꾼들이 다 모여 있다”는 중앙일보 인터뷰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이슈를 촉발하고 논쟁을 끌고 가는 건 전형적인 정치 행위다.
그를 유력한 대권 잠룡으로 보는 이들이 정치권에 적잖다.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 최근 평론가로 활동 중인 정두언 전 의원이다. 그에게 전화로 물었다.
- ‘정치인 유시민’의 경쟁력이 있나.
- 국회에 있을 때는 왕싸가지였다. (※두 사람은 17대 국회에서 여야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상 밖으로 부드러워졌다.
- 부드러워진 계기가 뭐라고 보나.
- 방송의 힘이다. 그런데 봐라. 안철수도 ‘무릎팍 도사’가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도 ‘힐링캠프’가 있었다.
- 왜 유시민이 가장 유력한가.
- 여권 주류인 친노 중에 유시민 말고 누가 있나.
여권 내 전망은 다소 엇갈린다.
그가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임명직ㆍ선출직 공무원, 앞으로 내 인생에 없다”고 밝힌 걸 믿는 이들이 있다. 이광재 원장도 그 중 한명으로 “정치 자체가 가진 소모적인 부분을 싫어한다. 글 쓰고 방송하는 등 다른 식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게 본인에게 어울린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지만, 결국엔 정치인 유시민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민주당의 핵심 관계자 중 한 명이 사석에서 한 말이다.
“본인이 정치하고 싶지 않은 의지가 큰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대와 국민이 요구하면 전면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정치 안 한다고 했다가 끌려 나오지 않았나. 당 입장에선 주자가 많을수록 좋다.”
권호ㆍ이병준 기자 gnom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