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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뼈로 뒤덮힌다…파괴의 시대 '인류세' 진입하는 지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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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인류세를 표지기사로 다룬 2015년 3월 네이처.

인류세를 표지기사로 다룬 2015년 3월 네이처.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40초.

플라스틱 쓰레기, 닭 소비 엄청나 #지구 생물 대멸종 현재 진행 중 #KAIST 세계 첫 인류세연구센터 #첫 사업으로 위성 통해 DMZ 조사

138억년에 달하는 우주의 역사를 일 년으로 요약했을 때, 하루의 끝을 단 20초 남겨둔 시간이다. 이 최후의 시간에 비로소 인간은 야생 동·식물을 길들이고 농경을 시작했다. 이 한 달짜리 ‘우주 달력’을 기준으로 하면 인간이 문자를 발명해 쓰기 시작한 것은 자정을 14초 남긴 때이며, 과학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알기 시작한 것은 자정을 단 1초 남긴 시점이었다. 우주 나이의 3분의 1인 지구의 나이 약 46억년에 비춰봐도 인간의 역사는 극히 짧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증거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인간은 지구에 어떤 영향을 얼마나 끼쳤을까. 1995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의 화학자 폴 크뤼천은 그 영향을 단 한 단어로 표현했다. 바로 ‘인류세(Anthropocene·人類世)’다. 인간의 활동으로 지질학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의미다. 그는 2000년 한 지질학 회의에 참석해 “우리는 더는 홀로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세에 있다”고 말하며 이산화탄소(CO2)와 플라스틱의 과도한 배출 등 인간의 자연환경 파괴로 지구가 전례 없는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층서위원회(ICS·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는 2016년 10월, 인류세를 공식적으로 도입할지를 두고 투표를 진행했지만,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류세가 처음 언급된 이후, 과학계에서는 인류세의 고유한 특징을 측정하고 이를 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18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술문화관에는 폴 크뤼천의 생각을 잇는 문화 인류학자, 인공위성 전문가, 예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였다. 단일 연구기관으로는 세계 최초로 문을 연 ‘KAIST 인류세 연구센터’ 개소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센터장을 맡은 박범순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는 “인간이 지구의 모습을 바꾸는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했다”며 “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삼고 있는 한국과 달리, 세계는 현시대를 인류세로 정의하고 있다”며 연구의 필요성을 밝혔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인류세 연구에 왜 이처럼 다양한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질까.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이 다양한 영역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개소식에 참여한 크리스토프 로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과학사 연구원은 “지금까지 인류세에 관한 지식은 모자이크처럼 혼재돼 있다”며 “학문의 영역을 구분하지 않는 초학제적 연구를 진행하고 대중과 이 담론을 함께 해야 한다”고 향후 연구 방향에 관해 설명했다. 인류세 연구가 사회 운동의 성격도 함께 지닌다는 의미다.

시대 및 지층을 구분할 만큼 인류가 지구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증거도 제시됐다. 대표적으로 폭발적인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과 닭 사육량이 꼽혔다. 먼 미래에 누군가 지구의 지층을 살폈을 때 인류세의 지층에서 플라스틱과 닭뼈 등이 대거 발견되는 특징을 이룰 수 있다는 얘기다.

박범순 센터장은 “플라스틱 쓰레기는 태평양에 거대한 섬을 이뤄 떠다니고 있다”며 “플라스틱은 동물의 먹이 사슬 속에서 순환하고 있어 ‘플라스틱식성(Plastivore)’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는 또 “2016년 기준 15억 마리의 돼지가 소비되는 동안 닭은 658억 마리나 소비됐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앞선 시대의 구분 기준이 된 생물 대멸종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 핵실험으로 플루토늄-239가 전 지구적으로 늘어난 점도 인류세의 특징으로 꼽혔다.

KAIST 인류세 연구센터는 일차적으로 한국에서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인간의 발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비무장지대(DMZ)를 인공위성 등을 통해 조사할 예정이다. 또 이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서울시립과학관, 대전시립미술관 등과도 협력해 연구를 예술 영역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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