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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귀국해서 기술자립 위해 힘써주게” 김재익 수석 전화에 목이 멨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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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82년 초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던 김재익 박사가 미국에 전화를 걸어왔다. “소식을 들으니 자네 아들 진후가 건강히 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니 반갑네. 이제 귀국해 나라를 위해 일하자”는 연락이었다. 김 박사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원자력 엔지니어링 회사를 세웠는데 경영이 어려우니 해결책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608) #<60> 한국형 표준원전 첫걸음 #연구·현장 접목 엔지니어링 #과학기술 정책연구 때 눈떠 #미국과학재단 근무중 신념화 #원자력 엔지니어링 KNE 난관 #귀국해 KNE 맡으라는 김 수석 #기술자립 일념으로 사장 취임

아랍에미리트(UAE)에 짓고 있는 바라카 원전 1, 2호기의 모습. 3세대 한국표준형원전(APR1400) 기술을 적용했다. 한국은 2009년 UAE에 원전 4기를 짓는 계약을 맺고 세계 5번째 원전 수출국이 됐다. [중앙포토]

아랍에미리트(UAE)에 짓고 있는 바라카 원전 1, 2호기의 모습. 3세대 한국표준형원전(APR1400) 기술을 적용했다. 한국은 2009년 UAE에 원전 4기를 짓는 계약을 맺고 세계 5번째 원전 수출국이 됐다. [중앙포토]

사실 나는 70년대 초반 한국과학원 과학기술사회 연구실에서 10개국 과학기술 정책연구(STPI)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창의적 공학 설계와 현장 자문 역할을 수행하는 엔지니어링 산업에 눈을 떴다. 당시 논문에서 “많은 개발도상국이 과학기술을 국가발전 정책수단으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연구 결과를 시장 및 현장과 연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이 경제사회 발전에 기여하려면 엔지니어링 기업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6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렸던 세계원자력 및 방사선 엑스포 행사 장면. 관람객들이 국내기술로 개발된 원자력발전용 신형경수로 APR1400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APR1400은 건설중인 신고리 3,4호기와 신한울 1,2호기에 사용됐고 2009년 UAE에도 수출됐다. [중앙포토]

2016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렸던 세계원자력 및 방사선 엑스포 행사 장면. 관람객들이 국내기술로 개발된 원자력발전용 신형경수로 APR1400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APR1400은 건설중인 신고리 3,4호기와 신한울 1,2호기에 사용됐고 2009년 UAE에도 수출됐다. [중앙포토]

미국과학재단에서도 다양한 기술의 조합 능력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하는 엔지니어링 기업의 육성을 강조하는 논문을 썼다. 첨단 과학기술 응용·개발의 견인차 구실을 하는 국방부 고등연구소(DARPA), 에너지부 국립연구소, 상무부 국립연구기관과 정보교환과 협력을 계속하며 이런 믿음을 더욱 굳혔다. 한국원자력연구소는 같은 맥락에서 75년 미국 기업 ‘번즈앤로’와 합작해 원자력 엔지니어링 회사인 ‘코리아 아토믹 번즈앤로(KABAR)’를 세웠지만 경영난으로 76년 번즈앤로가 철수하고 한국원자력기술주식회사(KNE)로 개명했다.
나는 김 수석의 질문에 “원자력 기술자립을 위해선 연구기관인 한국원자력연구소와 기술회사인 KNE가 나란히 발전해야 한다”고 답하고 “원전 건설을 이끄는 한전이 KNE에 투자해 기술 자립을 지원하는 장기전략이 필요하다”라고 역설했다. 며칠 뒤 김 수석이 다시 전화해 “의견대로 한전이 KNE의 대주주가 됐으니 귀국해 이 회사를 맡아 STPI 논문대로 기술자립을 위한 엔지니어링 회사로 키워보라”고 말했다. 나라의 기술 자립을 위해 일하자는 그의 말에 목이 메었다.

1982년 당시 청와대 경제 수석을 지낸 김재익 박사. [중앙포토]

1982년 당시 청와대 경제 수석을 지낸 김재익 박사. [중앙포토]

나는 82년 7월 2일 당시 여의도 한전 건물에서 취임식을 하고 사명을 한전기술주식회사(KOPEC)로 바꾸고 한전 일거리를 맡게 됐다. 나는 이 회사에서 원전 기술자립과 설계 표준화를 추진했다. 미국과학재단에서 79년 벌어졌던 스리마일아일랜드(TMI) 원전 사고의 원인 분석과 대응 정책을 연구하면서 원전 안전을 위해선 건설과 운전을 포함한 설계 표준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 같은 기술 후발국이 원전 같은 고등기술을 안전하게 사용하고 기술 자립화를 이루려면 ‘설계 표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게 됐다. 모두가 시기상조라고 말렸지만 나는 과감하게 나섰다. 지금 하지 않으면 더욱 오랫동안 기술 종속국에 머물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나를 행동으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전 세계에서 기술력과 안전성을 인정받는 한국형 표준 원전은 이렇게 첫걸음을 뗐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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