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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김정은 연내 답방” 무산돼…지도자 말 신뢰 잃으면 곤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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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 대통령의 빗나간 말말말 7대 뉴스

‘양치기 소년’은 말의 신뢰를 잃은 사람한테 닥치는 위기에 관한 이야기다. 심심해서든 상황 판단의 잘못에서든 소년은 두 번 거짓말했다.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고 세 번째 소리쳤을 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더는 속고 싶지 않았다. 이솝 우화는 그렇다 치고 대통령의 말이 신뢰를 잃을 때 닥칠 나라의 위기는 가늠하기 어렵다. 국제 사회나 일반 국민, 심지어 집권 세력 내부에서 대통령의 말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생길 수 있다. 한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기는 힘들다. 대통령이 아무리 진정성 있는 태도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해도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런 나라는 곤란하다. 마을의 양 몇 마리가 잡혀먹히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국가의 재앙이요 국민적 혼란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환하다.

대통령의 언어 바위같이 무거워야 #프란치스코 교황 방북도 “불투명” #김정은 약속 너무 믿은 것 아닌가 #작년엔 위험해서 탈핵하겠다더니 #올해 체코선 “한국 원전 안전하다” #누가 대통령의 판단을 흩트리는가 #경솔했던 ‘계엄령 문건’ 수사 지시 #넉 달 뒤 혐의 확인도 못 한 채 종결 #청와대 핵심 참모들이 책임져야 #내년엔 날 선 통치언어로 신뢰 얻길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온 세상을 향해 숱한 말들을 쏟아 냈다. 대체로 깊은 인상과 감동을 줬다. 나라 경영에 효과적인 말들이 많았다. 종종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말도 있었다. 분열적이거나 사실과 다르거나 지켜지지 않은 말들이 그러했다. 대통령의 말, 즉 통치의 언어는 바위처럼 무거워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어선 안 된다. 대통령의 언어에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책임지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통치의 경계로 삼으라고 올해 문 대통령의 일곱 가지 허언(虛言)을 꼽아 봤다. 일곱 개 허언은 대중적 논란과 사안의 중요성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추출했다. 분류해 보니 탈원전·소득주도성장·적폐수사·인사·대북 등 5대 정책 분야에서 발생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빗나간 말말말 그래픽 이미지.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빗나간 말말말 그래픽 이미지.

①“한국 원전, 40년간 사고 한 건 없어”

11월 28일 체코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에게 “한국은 24기 원전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난 40년간 원전을 운영하면서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 아랍에미리트의 바라카 원전도 사막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비용추가 없이 공기를 완벽하게 맞췄다”고 자랑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2017년 6월 19일 울진의 고리1호기를 강제 폐로시킬 때와 180도 달랐다. 그는 당시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 상상할 수 없는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탈핵 국가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원전을 무슨 범죄자 대하듯 했다. 이런 문 대통령이 3월 26일 아랍에미리트에서 “바라카의 한국 원전은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첫 번째 양치기 소년 같은 소리를 하더니 여덟 달 만에 체코에서 두 번째 비슷한 언급을 한 것이다. ‘한 입 갖고 두말한다’는 속담에 딱 맞아 떨어진다. 문 대통령은 원전 문제에 관한 한 분열적 판단을 노출했다. 그저 바라기는 원자력의 마지막 숨통인 울진의 신한울 3, 4호기만은 죽이지 말아 주시길.

②“경제 호조, 물들어 올 때 노 저어라”

11월 20일 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자동차는 생산이 다시 증가하고, 조선 분야도 세계 1위를 탈환했다. ‘물들어 올 때 노 저어라’는 말처럼 최선을 다해 달라”고 했다. 대통령 혼자서만 자동차·조선이 좋아졌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국내 자동차 생산량은 지난해 중국에 이어 올해 인도에도 밀려 세계 7위로 전락했고 현대차는 영업이익 감소로 어닝 쇼크에 빠졌다. 조선은 잠깐 수주량이 늘었을 뿐 2007년의 2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대통령이 단발성 수치 하나로 우리 경제가 마치 활력이라도 되찾은 듯한 과장 보고에 휘둘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에게 경제 상황의 큰 흐름을 제대로 보고해야 할 책임자는 김수현 정책실장이나 윤종원 경제수석이다. 이들은 대통령을 ‘벌거숭이 임금님’처럼 우습게 만들었다.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려야 한다.

③“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 90%”

5월 31일 문 대통령은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참석한 관료들에게 “최저임금 증가의 긍정적 효과를 충분히 자신 있게 설명해야 한다. 긍정적인 효과가 90%다. 고용된 근로자 임금이 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득 하위 1분위(20%)의 소득이 많이 감소한 것은 아픈 대목이지만 최저임금의 급격한 증가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했다. 놀랍게도 문 대통령은 자영업자 폐업 속출, 역대 최고의 실업률이 최저임금 급증의 부정적 효과임을 모르고 있었다. 통계청의 조사 수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없다. 청와대 사람들이 다른 국책기관을 동원해 기묘하게 조정하고 괴상한 궤변을 첨가해 문 대통령을 홀린 것이다. 아예 자기들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통계청장을 갈아 치우기까지 했다.

12월 17일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린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대통령은 “최저임금 인상 같은 새로운 경제정책은…필요한 경우 보완 조치도 강구해야 할 것”으로 말투가 바뀌었다. 대통령의 인식이 부분적으로나마 교정되는 데 일곱 달이 걸렸다. 하지만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가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④“계엄령 문건, 세월호 사찰 수사하라”

올해 문 대통령의 말말말 중 최대 헛발질 사건이다. 7월 10일 청와대는 인도를 방문하고 있는 대통령의 지시라며 “촛불집회 때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계엄령 검토 문건을 국방장관의 지휘를 받지 않는 군 독립수사단이 수사하라. 2014년 기무사가 세월호 유족을 사찰한 사건도 수사하라”고 발표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대통령 부재중 현안점검회의라는 모임을 열어 무슨 현존하는 대단한 위험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해외의 문 대통령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아 냈다. 나중에 드러나다시피 제대로 된 사실 파악, 법률 검토도 이뤄지지 않았다. 경솔하기 짝이 없었다. 주무 책임자는 조국 민정수석, 발표는 김의겸 대변인이 맡았다. 우선 ‘국방장관 지휘를 받지 않는 군 독립 수사단의 구성’은 헌법(74조·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군을 통수한다)과 법률(군사법원법 38조·국방장관은 일반적으로 검찰관을 지휘·감독한다) 위반 혐의가 있다. 임종석의 청와대 비서회의가 대통령으로 하여금 위헌·위법을 저지르게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다.

11월 7일 계엄령 문건 합동수사단은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을 기소 중지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쳤다. 넉 달간 총력 수사를 벌였으나 혐의를 확인하는 데 실패했다. 세월호 사찰 의혹은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가 담당했는데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구속영장이 기각됨으로써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 오히려 이 전 사령관의 비통한 죽음으로 공안2부가 별건·표적 수사를 했다는 의심을 샀다. 이로써 문재인 정권의 트레이드 마크인 적폐 청산 수사의 동력은 약화했다.

⑤“믿어 달라. 정의로운 나라 만들 것”

12월 1일 해외 순방 중인 문 대통령은 특감반원 전원 교체 등 잇따른 청와대 국기 문란 사건들에 대해 페이스북 글을 올렸다. “국내에서 많은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 믿어 주시기 바란다. 정의로운 나라를 꼭 이루겠다.” 이 글을 보고 사람들은 대통령이 귀국하면 조국 민정수석 경질을 포함해 엄정한 조처를 할 줄 알았다. 결과는 정반대. 조 수석에게 더 큰 힘이 실렸다. “이런 내로남불이 없다” “문 대통령의 정의와 보통 사람들의 정의가 이렇게 다른가”라는 한탄이 쏟아져 나왔다. 쫓겨난 김태우 전 특감반원이 ‘청와대 불법 민간인 사찰 의혹’ 등을 연이어 제기하자 임종석 비서실장, 조국 민정수석, 윤영찬 국민소통수석, 김의겸 대변인에다 대검까지 총동원돼 그를 이지매하는 모양새가 됐다. 국회 국정조사로까지 번질 판이다. ‘미꾸라지’(윤 수석의 표현) 한 마리가 용으로 커지고 있지만, 대통령은 침묵하고 있다.

⑥“김정은, 연내 답방 가능성 있다”

문 대통령은 12월 1일 아르헨티나에서 뉴질랜드로 가는 기내 간담회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연내 답방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했다. ‘9·19 평양공동선언’ 6조는 김정은이 “가까운 시일 내로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만 돼 있다. ‘가까운 시일’이 대통령의 육성 때문에 ‘연내’로 특정됐으니 온 세상이 이를 기정사실로 할 수 밖에. 결과적으로 김정은은 오지 않았고 문 대통령은 뻥카드만 날린 셈이 됐다. 대한민국이 가벼운 나라가 아니기에 대통령의 말도 경박해선 안 된다. 한번 나온 말은 지켜져야 하고 대통령의 예측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실현되어야 한다.

문 대통령의 예측이 무산된 것에 대해 북한과 관련된 정보 제공의 의무가 있는 서훈 국정원장이나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책임을 져야 한다. 김정은을 세 차례 만나고 트럼프 대통령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눈 문 대통령이 스스로 오판한 것일 수도 있다. “김정은은 약속을 지키는 지도자”라는 굳센 믿음을 가진 문 대통령이 ‘연내 방남’ 언질을 받았다 속은 건지도 모른다.

⑦“교황, 공식 초청장 오면 북한 방문”

10월 18일 바티칸에서 교황 면담을 마치고 나온 문 대통령은 “북한이 공식 초청장을 보내 주면 무조건 응답을 줄 것이고, 나는 갈 수 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을 전했다. 그때 대통령을 수행한 청와대 참모들은 ‘문 대통령이 김정은한테 교황의 방북을 수용하도록 설득했고, 이 내용을 전달해 교황으로부터 사실상 방북을 수락받았다’고 흥분했다. 두 달 뒤인 12월 19일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방송은 교황청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2019년 교황의 북한 방북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해외 순방 일정이 꽉 찼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교황한테 공식 초청장도 보내지 않았다. 악의적인 외신들로부터 ‘김정은의 대변인이냐’는 조롱까지 들은 문 대통령의 착한 중재 외교가 또 한 번 우스워지는 장면이다.

내년은 문재인 정부가 임기 5년 중 3년 차를 맞는 해다. 누구에게도 핑계를 댈 수 없는 시기다. 이제 신뢰가 의심스러운 통치 언어는 사라져야 한다. 청와대, 정부 부처가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일각에서라도 ‘대통령은 양치기 소년’이라는 소리가 안 나오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의 말의 가치가 지켜져야 한다. 통치 언어의 날이 서야 한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