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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의 골프이야기] "내 말 듣고 이병철 회장 車사업 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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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이병철 삼성 회장과 아이아코카 크라이슬러 회장.

JP의 골프이야기 속에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의 인연이 자주 등장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근대화’를 지상과제로 삼았던 JP였기에 경제계의 대표적 인물인 이병철 회장과의 만남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골프를 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필드에서는 사업에 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중 하나가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이다.

삼성그룹에서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것은 이건희 현 회장 때였으나 그에 앞서 이병철 회장도 자동차 사업에 꽤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JP의 조언에 따라 아이아코카를 만난 후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JP의 회상을 들어보자.

“이병철씨와 도쿄에서 만나 ‘클럽300’이라는 골프장에서 가끔 공을 치곤 했어요. 회원이 300명으로 제한되어 있는 이 골프장은 가입 희망자가 줄 서 있을 정도로 명문이지요. 일본인만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는데도 예외적으로 이병철 회장은 멤버십을 가지고 있었어요. 골프를 치면서 이 회장이 느닷없이 자동차 사업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지 뭡니까. 총리 그만두고 일본에 갔을 때니까 77, 78년쯤 됐을 겁니다.

자동차에 대한 연구를 상당히 했습디다. 그때 내가 ‘자동차 사업이 한국에서 장래성이 있을까요’라고 되물은 기억이 납니다. 당시 미국의 캐딜락, 링컨 컨티넨탈, 독일의 벤츠, 영국의 롤스로이스, 스웨덴의 볼보 같은 차들이 베스트 5에 들어있었어요. 80년대 초에 크라이슬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이아코카가 경영자로 영입돼 성공적으로 일으켜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 후 아이아코카가 일본을 방문해 도요타자동차 회장을 만났을 때 ‘자동차 하면 미국인데 일본이 미국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도요타 회장의 대답이 걸작이었어요. ‘당신들은 자동차를 손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하트(마음)로 만든다’고요. 그 말에 아이아코카가 두 손 들었다고 합니다. 이병철 회장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조만간 아이아코카가 한국에 오니 만나서 의견을 들어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후 아이아코카가 방한했을 때 이 회장이 그를 만났으나 ‘앞으로 일본 차를 당할 차는 없을 것’이라는 아이아코카의 말을 듣고 자동차 사업 진출을 단념했지요.”

그동안 ‘JP의 골프이야기’ 연재를 맡아왔지만 실제로 JP가 골프를 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가 70대 후반 또는 80대 초반의 스코어카드를 보여줬을 때 내심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아무리 골프를 좋아하고 자주 치는 JP라 해도 팔순 고령이 아닌가.

그러던 참에 JP로부터 “라운딩이나 한 번 하지”라는 제안을 받았다. 장소는 JP가 자신의 생애 최저타인 2언더파 기록을 세웠던 서서울CC. 푸른 창공에는 거추장스러운 구름 한 점 없었으며, 페어웨이는 녹색 물감을 뒤집어 쓴 듯 선명했다. 그 한가운데 있는 사람은 한국 정치사에서 큰 획을 그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 천천히, 그러나 과감하게 후려치는 그의 드라이브샷에는 짙은 관록이 묻어났다. 드라이버 비거리는 200야드 정도였으나 정확도가 돋보였다. 근력이 떨어진 팔순 고령자임을 감안한다면 결코 짧은 비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성이 쓰는 레드 티에서 치는 것도 아니고 보통 남성이 쓰는 화이트 티에서 파를 잡기에는 다소 부담되는 거리였다.

“저 정도 비거리로 어떻게 파나 버디를 잡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JP는 3번 우드를 꺼내들고 세컨드 샷을 날렸다. 이미 유연성이 떨어져 뻣뻣한 몸이었지만 세컨드 샷은 정확하게 온그린 하거나 그린 근처 에지에 떨어졌다. 파3 홀을 제외한 나머지 홀에서는 예외없이 이런 식의 공략이었다.

“총재님, 세컨드 샷을 그 어려운 우드로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칩니까”라고 말을 걸자 “허허, 그래서 내가 평생 2인자 아닌가”라고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어프로치 샷은 일품이었다. 30야드 이내에서는 거의 대부분 원 퍼트 거리에 붙었다. 가위 ‘컴퓨터 어프로치 샷’이라 할 만했다. JP는 라운딩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양해를 구했다. 고령이라서 무리하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벙커 샷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롱퍼팅이 들어가면 농을 한다. “이래서 구정치인 무시 말아야 해….”

JP와 라운딩해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매우 편안하고 재미있다”고 소감을 말한다. 실제로 그랬다. 라운딩하면서 꽃과 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인생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다방면에 해박한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 샷이 잘 된다. 그래서 JP 주변에는 골프 친구들이 많이 몰린다.

JP를 만나면서 찾아낸 인생 키워드는 ‘여유’다. 40여 성상(星霜)을 거친 정치판에서 보내면서도 큰 잡음 없이 골프 삼매경에 빠질 수 있는 것도 JP 특유의 여유 때문인 것 같다. JP의 청구동 자택 응접실에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이란 글귀가 걸려있다.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이 글귀를 좌우명 삼아 JP는 우여곡절을 용케 극복해왔다.

“나는 누가 속을 뒤집는 소리를 해도 허튼 대답은 안 해요. ‘허허’ 하고 속으로 웃기만 할 뿐이지. 일일이 대꾸하면 뭐해. 허튼 말꼬리나 제공하는 꼴이 되지.”

‘4대 의혹사건’ ‘호화 주택 매입설’ ‘한·일 청구권 협상’ ‘독도 관련 발언’ ‘DJP 연합 잡음’ ‘골프 구설수’ 등 JP를 둘러싼 음해성 설왕설래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의 반응은 언제나 ‘소이부답’으로 일관했다.

“나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으면 됐지 구차하게 변명할 필요 없어. 진실은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지는 겁니다.”

웬만한 일 가지고는 좀체 격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JP지만 ‘나라’ 이야기에 한해서만은 예외다. 목숨을 걸고 혁명을 수행해 근대화의 초석을 다졌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그런 ‘나라’가 흔들리는 꼴은 잠자코 바라볼 수 없는 모양이다.

“한국동란 중인 1951년 미국에 갔을 때 천국이 따로 없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나라를 못 만드나, 언젠가 때가 되면 만들어보자는 게 5·16 군사혁명의 동기였지요. 이 나라는 몇천 년을 살아온 조상의 것이며, 후손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잠시 한 구간을 맡았다고 위정자들이 제멋대로 국사를 주무르는 짓은 말도 안 돼요. 자신과 코드가 맞는다고 아마추어나 포퓰리즘의 사람들을 요직에 앉혀 일이 잘못되면 누가 책임집니까. 골프 치면서 그런 생각을 하면 공이 안 맞아. 이 나라는 앞으로 몇만 년, 몇억 년 우리 자손들이 살아야 할 곳입니다.

그러기에 잠깐 동안이라도 책임 맡은 사람들은 똑바로 사심 없이 국민에게 봉사해야 해요. 우리 자손들이 편안한 환경에서 평화롭고 자유롭게, 그리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80이 넘어 어쩔 도리도 없고, 그럴 땐 차리리 일찍 죽어버리는 게 낫다는 퇴행적인 생각도 하게 됩니다. 골프를 치다가 그런 생각이 들면 그날은 여지없이 스코어를 망치게 되지요. 허허….”

이코노미스트 김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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