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천진암에서 김장은 부처님 오신 날을 빼면 한 해 가장 큰 행사다. 요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보고 싶어하는 작은 축제다. 음식 고수와 유명 요리사들이 전국에서 몰려온다. 일본에서도 해마다 단체로 참가하고, 서양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찾아온다. 사찰음식의 ‘글로벌 스타’ 정관 스님이 있기 때문이다.
절 옆 텃밭서 키운 배추 300포기 #동물성 음식, 오신채 안 먹는 사찰 #김치 감칠맛은 간장?된장으로 내 #”스님 레시피는 할 때마다 달라요” #요리명장들도 궂은 일 하며 배워 #알아서 찾아온 외국인들 20여명
지난달 24일 90여 명이 모여 천진암 김장을 했다. 정관 스님 지휘에 따라 배추 300포기와 비슷한 부피의 갓으로 김치를 담그고, 오그락지∙섞박지∙감태지도 담갔다. 동물성 재료와 오신채(五辛菜: 마늘·파·달래·부추·흥거)를 쓰지 않는 절에서 김치 맛을 어떻게 내는지 살펴보니 감칠맛을 살리기 위해 집간장∙된장을 넣고, 청(매실∙함초∙복분자)을 다양하게 쓰는 점이 색달랐다.
김치도 김치지만, 스님의 음식과 음식을 대하는 마음을 배우기 위해 모인 참석자들도 ‘별들의 잔치’였다. 서로가 신기해하고 반길 만큼 다채로운 명사들이 참석했다. 셰프들의 셰프로 불리는 한식 명장 조희숙 셰프를 비롯해 ▷한국중식연맹 회장 겸 세계중식업연합회 부회장이며 중식당 홍보각 대표 여경래 셰프 ▷샌프란시스코 치즈공방 ‘안단테 데어리’의 김소영 명장 ▷‘박광희김치’의 박광희 명인 ▷이소영 찬방의 이소영 반찬 장인 ▷미쉐린 2스타 한식당 밍글스 강민구 오너셰프 ▷레스토랑 쵸이닷 최현석 스타 오너셰프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 고정 출연하는 한식당 두레유 유현수 오너셰프 ▷변호사 출신 요리사 이영라 ㈜어반 딜라이트 총괄셰프 ▷『작은 빵집이 맛있다』의 저자 ‘빵요정’ 김혜준씨 ▷개성찬방의 엄지아 대표 ▷서울 특급호텔의 서양인 총괄셰프 등이 눈에 띄었다.
일본에서는 동호회원 13명이 참가했다. 6년째 김장 때마다 오는데, 3명은 6년 개근했다고 한다. 다른 외국인도 10명 가까이 보였다. 서울에서 온 한 새댁은 시골 시댁 김장 날이라 형제들 모이는데 회사 일 둘러대고 왔다며 언론에 얼굴 나가면 큰일난다고 했다.
늦가을 비가 지루하게 내리는 날 정관 스님이 주요 여성 참가자들을 단상에 불러 소개하고 인사말을 하면서 김장은 시작됐다. 짧은 인사말 속에는 김장과 절에서 음식의 의미가 집약돼있었다.
“김장은 함께 하는 축제다. 예전에는 김장을 이웃과 품앗이로 했다. 그러면서 김치도 나눠 먹고 정을 나누고 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타이틀도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라고 했다. 오늘 그런 잔치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한다. 절에서는 사람에게 이로운 음식을 하는 것도 공덕이고, 식사 준비부터 설거지까지 전 과정이 수행이다. 배추가 채소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내 몸에 들어가 내 몸을 이루니 배추가 내 몸이라 생각하자. 내 몸 다루듯 조심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김치를 담가야 한다. 배추를 옮길 때도 다치지 않게 하고, 반으로 가를 때도 내 몸을 나눈다고 생각하면 손길 한 번 함부로 할 수 없다. 음식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마음을 꼭 새겨서 돌아가시기 바란다.”
5개 팀으로 나눠 테이블 위에 절인 배추와 양념을 올리고 김치를 비비기 시작했다. 배추는 천진암 옆 해발 600m 밭에서 농사지었다. 다듬고 반으로 갈라 소금물에 잠깐 담가서 수분을 빼고 건진 뒤 단면 밑동에 소금을 한 줌씩 뿌리면서 차곡차곡 쌓아뒀다가 한 시간 후 자리바꿈해 한나절쯤 무거운 물건으로 눌러 절였다.
경력 많은 남자 셰프들은 스님이 배정한 소임을 수행하고, 여성 요리 선생들은 스님을 돕거나 테이블을 돌며 김치 비비는 요령을 알려줬다. 테이블을 돌던 조희숙 셰프가 무언가 본 듯 “김치는 집집이, 지역마다 다르다. 다름을 인정해야 함께 할 수 있는 게 김장”이라고 사람들에게 일렀다.
배추에 양념 비비는 걸 보니 사람마다 달랐다. 심지어 스님이 2년 전 9월 24일 취재할 때 담그던 김치와 이번 김장도 판이했다.
▷2018년 11월 24일 통배추와 갓 김장: 3가지(연잎, 뽕잎, 표고 줄기) 우린 물을 섞어 고춧가루를 불린 후 찹쌀풀을 넣고 잘 저어서 두어 시간 불렸다. 간이 약간 짜니까 솥에서 끓는 연잎 물 세 바가지와 찹쌀풀 몇 바가지를 추가하고 고루 저었다. 뜨거운 물을 부어 익반죽처럼 하면 고춧가루 색이 더 곱게 난다고 한다. 다시 잠시 뒀다가 갈아 둔 피망∙토마토∙생고추(청양∙일반 동량)∙무∙생강∙청각을 섞은 다음 잘게 썬 적갓, 함초∙매실 청, 소금, 5년 집간장(젓갈 대신), 데친 메주콩 간 것을 넣고 30분 이상 젓는다. 콩은 고소한 맛과 단백질을 보충하면서 2차 발효를 담당한다고 한다. 완성된 양념은 되직하면서 맛은 부드럽고 간은 중간보다 약간 낮았다.
스님은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양념을 갈피에 넣는 게 아니라 줄기에 살짝 묻히는 정도로 하라”고 큰소리로 알렸다. 도시에서 간 사람들은 양념을 진하게 발랐다. 김장이 끝난 후 스님은 “서울 사람들이 비빈 김치는 양념이 너무 많아서 우린 못 먹어. 가고 나면 다 버릴 거야”라고 지청구를 했다.
▷2016년 9월 24일 솎음 배추와 갓 김치: 방부 역할을 하는 연잎 우린 물에 보릿가루 풀을 푼 다음 간수 뺀 천일염, 깊은 맛 내는 5년 집간장, 된장, 묽게 갠 고춧가루, 갈아 둔 마른고추∙홍고추, 초피가루, 매실·복분자 청, 참깻가루(반드시 갈아서)를 차례로 넣고 잘 젓는다. 간은 약간 짭짤하고 상태는 묽다. 절인 배추와 갓에 양념을 적시듯 버무린다.
양념 단장을 마친 김장 배추김치는 바로 스님의 김치 곳간으로 옮겨 땅에 묻은 6개 항아리에 차곡차곡 빈틈없이 쟁여 저장했다. 천진암에 머물며 5개월째 음식을 배우고 있는 젊은 요리사 허준영(22)씨는 김장 보름 뒤 통화하면서 ”스님 김치는 담글 때마다 레시피가 다르다. 같은 경우가 거의 없다”며 “지난번 김치 300포기는 여기저기 나눠줘 벌써 다 떨어져 간다. 며칠 있다가 여기서 먹을 김장 다시 하려고 밭에 남은 배추 40포기를 얼기 전에 뽑아왔다. 스님이 이번엔 찹쌀풀 안 넣고 삭힌 김치를 담근다고 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양념 진한 김치를 버리지는 않고 원하는 곳에 준 모양이다.
담글 때마다 다른 건 스님이 늘 말하는 지론을 상기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김장 양념 비율을 물으니 “감으로 적당히 맞춘다. 그때그때 다르다”면서 “레시피는 없다. 레시피대로만 하면 매번 똑같은 음식이 만들어진다. 그건 살아있는 음식이 아니다. 같은 재료라도 어느 때 어떤 마음으로 요리했고, 누구와 함께 먹을지에 따라 음식이 달라진다. 작은 씨앗 하나가 햇살과 비∙바람 머금어 큰 배추가 되는 것은 하나의 창조다. 그게 입으로 들어와 내 몸이 되는데 무슨 레시피가 필요한가”라고 말했다.
김장 날 담근 다른 지(김치의 일종)도 간략히 소개한다.
▷오그락지: 오그락은 무말랭이다. 스님의 고향은 경북 영주다. “거기선 그렇게 말해. 무가 오그락 오그락 마르잖아”라고 했다. 무말랭이는 한번 씻어서 한동안 두면 잘 붇는다. 오래 불리면 무 냄새가 나서 맛이 없다. 불린 무말랭이를 매실청, 소금, 집간장으로 애벌 무쳐 간이 배게 한 다음 불려 저민 건표고, 매실청에 불린 고춧잎, 손가락 굵기로 자른 생 콜라비와 말린 콜라비, 초피가루를 넣고 잘 섞는다. 마지막에 차조풀을 넣고 버무린다. 바로 먹어도 되고 김치냉장고에 한 달쯤 익혀 먹어도 좋다. 안동∙영주에서는 골곰짠지라 하여 김장철 저장 음식으로 많이 한다.
▷섞박지: 무를 아기 손바닥 크기에 두께 1㎝ 정도로 자른 다음 집간장∙복분자청∙고춧가루∙소금에 버무리고 김장 양념과 적갓, 찹쌀풀, 청각 간 것을 넣고 전체를 섞는다. 한 달쯤 익혀 먹으면 국물이 시원하고 맛이 좋다. 무는 설 전에 일찍 먹을 건 절이지 않고 담그지만, 오래 두고 먹으려면 절여야 한다.
▷감태지: 잘 익은 동치미 무(아주 짰다)를 채 썰어 집간장과 섞는다. 삭힌 고추도 2mm 길이로 잘게 썰어 넣고 생 감태와 버무린다. 감태는 도반이 있는 무안군 해제 원각사 앞바다에 가서 뜯어 바닷물에 씻어온 것이다. 예전에 부엌문 뒤에 두고 설 전에, 동치미가 익는 동안 먹던 음식이다. 감태지를 다 먹으면 동치미 독을 헌다. 먹을 때는 적당량을 덜어내 배 채를 섞어서 상에 낸다.
글∙사진=이택희(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