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없고 ‘빽’도 없는데 공부라도 잘해야지, 아니면 어떻게 먹고 살래?”
살다 보면 주워 담고 싶은 말이 있다. 내게는 이 말이 그렇다. 아래로 여섯살, 아홉살 터울인 두 동생들에게 ‘이게 다 너희 잘되라고 그런 거야’라며 했던 독한 말들. 그때 당시엔 공부가 유일한 비상구라고 생각했다. 요즘 언론을 장식하는 수능 만점자 수준의 노력이나 능력이 뒤따랐던 건 아니지만 그저 내 나름대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유년기를 보냈다. 이게 정답이라고 믿었고, 동생들도 그 길을 걸어줬으면 하는 욕심에 매일 숙제 검사를 하는 등 부단히 채찍질을 했다.
하지만 남동생은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여동생은 성적에 맞춰 대학에 갔지만 전공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동생들을 위한다고 한 내 행동들이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 아닐까, 자책감이 한동안 지속됐다.
2018년 교육기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대학 진학률은 68.9%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여전히 최상위 수준이다. 모두가 학업에 뚜렷한 뜻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암묵적인 진실이다. 높은 대학진학률은 단순한 교육열뿐 아니라 고졸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반영하는 사회적 지표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장은 따고 봐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가 나는 참 어려웠다.
최근 들어 생각이 바뀐 이유는 동생들의 변화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게 없다던 남동생은 사회생활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가게를 차리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됐다. 여동생은 대학 분교에서 배울 수 있는 전공에 흥미가 생겼다며 지방으로의 유학을 택했다. 주위의 시선과 관계없이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동생들이 이제는 대견해 보인다.
몇 달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 근교의 한 와이너리에서 마당을 쓸고 있던 한 할아버지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Are you happy(행복하니)?” 와인 시음을 마치고 한껏 들떠 있던 나는 큰 소리로 ‘예스’를 외쳤다. 그러자 그는 “That‘s important(그게 중요한 거야)”라며 찡긋 웃었다.
이 짧은 대화에서 얻은 깨달음이 하나 있다. 누군가의 인생을 평가할 수 있다면 그 유일한 기준은 그 사람의 행복이어야 한다는 것. 동생들에게 대학 진학을 강요하기 전에 대학을 안 가도 수능을 망쳐도 우리 모두는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게 어른들의 역할인데 그걸 잘 못 하고 있다고 말해줬어야 했다. 그리고 더 자주 이렇게 물어봤어야 했다. “너는 어떨 때 행복하니?”
김경희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