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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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인성의『한없이 낮은 숨결』(문학과 지성사)을 덮고 나는 망연해진다. 어려워서가 아니다. 일곱 장의 원고지 틀에 그 알마음의 노동을 가둔다는 것이 가소로운 때문만도 아니다. 그런 식의 망연함이라면 따로 긴 글을 준비함으로써 넉넉히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그때 해소되는 것은 알마음의 노동에 맞선 알마음의 부딪침과 증폭의 욕망이 아니다.
그 알마음의 노동을 그토록 불충분한 언어의 틀 안에 가두고, 나누고,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욕망만이 겨우 해소될 뿐이다(그것마저도 불충분하게). 제아무리 긴 글을 쓰더라도 나는 과연 내가 그 온통 벌거벗은, 혹은 벌거벗으려는, 한없이 낮아지려는 그 숨결과「서로서로 꼬리를 물고 돌게 하며 그 가운데의 낯선 공간을 우리의 그 무엇으로 빚어낼 수 있는」 나의 숨결을 맞대게 했는지 자신할 수 없고,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똑같은, 아니 흉내라도 낸 듯한 나의 알마음의 글, 글 아닌 그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단지 더듬거릴 수 있을 뿐…
그런 대로 나의 그 모자른 재주를 가지고 그의 그 지독한 순정을 어설프나마 뒤따르기로 마음먹는다. 순정? 갑자기 환해온다. 그 범속한 단어가 갑자기 가슴을 친다. 나를 가슴 떨리고 망연하게 만든 것은 그의 그 지독한 순정이 아니었을까? 소설장이로서의 소질을 향한 무수한 복수인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향한…
순정의 바닥에서는 선택·나눔이었는게 아니라 받아들임·융합이 있다. 흔히 그의 소설을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그 순정을 기미조차 눈치채지 못했거나 순정의 바닥까지 가려는 노력을 애당초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나의「그 모자른 재주」라는 말은「모자른 순정」이라는 말로 바뀌어야한다.
『낯선 시간 속에서』의식을 나누었던 이인성은 이제 그 의식들과 맞서 싸우면서 그것을 다시 융합하는 알마음의 노동을 떠맡는다. 순정 . 알마음·에로티시즘… 진부한 말들이다. 그러나 말의 진부함이 그 의미의 진부함과 그대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의 실현은 더욱 그렇다. 더더욱 말로 실현하기란 그런 깨달음으로 다시 보니 그 순정 뒤에는 엄청난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
말로 말 아닌 것을 실현하기, 소설가이면서 소설가가 아니기, 제 이름으로 된 책을 쓰면서 제 이름 버리기, 말을 바꾸면 가장 실존적인 신화 만들어 내기…. 그 욕심은 다시 사람이라는 진부한 단어로 이어진다. 사람은 그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존적이면서 또 얼마나 신화적인가? 얼마나 따스하고 가까우면서 얼마나 엄청난가? 그 얼마나 모순이며, 모순인 만큼 넓게 깊게 포용하는가? 그러니 작가 스스로도 더듬거릴 수밖에….
「어디로부턴가…, 누구부턴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그 숨결…, 와, 닿아…, , , 아무리, 멀어도…, 곁에…, 살아, 있는…, 있어 죽어가는…, 이어져 사는 …, 그 어떤, 무엇 혹은 누구, 의 …, 한없이 낮은, 말결 숨결…, 바싹…, 진하게…,, 살아짐에…, 죽어짐에 …,한결로…, 취할 만큼 …,」
갑자기 나도 더듬고 싶어진다. 진 형 준<홍익대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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