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빨래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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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빨래꽃’- 유안진(1941∼ )

이 마을도 비었습니다

국도에서 지방도로 접어들어도 호젓하지 않았습니다

폐교된 분교를 지나도 빈 마을이 띄엄띄엄 추웠습니다

그러다가 빨래 널린 어느 집은 생가보다 반가웠습니다

빨랫줄에 줄 타던 옷가지들이 담 너머로 윙크했습니다

초겨울 다저녁 때에도 초봄처럼 따뜻했습니다

꽃보다 꽃다운 빨래꽃이었습니다

꽃보다 향기로운 사람냄새가 풍겼습니다

어디선가 금방 개 짖는 소리도 들린 듯했습니다

온 마을이 꽃밭이었습니다

골목길에 설핏 빨래 입은 사람들은 더욱 꽃이었습니다

사람보다 기막힌 꽃이 어디 또 있습니까

지나와놓고도 목고개는 자꾸만 뒤로 돌아갔습니다.



온 마을이 꽃밭이었습니다. 욕쟁이 할머니꽃, 황해도 할아버지꽃, 감나무집꽃, 딸부자네꽃, 금니쟁이꽃, 황소장사꽃, 한의사꽃, 무당꽃, 켈로부대꽃, 부산 아줌마꽃, 호주 신부님꽃… 저마다 꽃이었습니다. 시골은 이제 흔적입니다. 그런데 유적지와 같은 시골에 낯선 어린 꽃들이 핍니다. 그 꽃들의 외가는 필리핀이나 베트남입니다. 어린 혼혈꽃들이 홀대 당하지 않고, 더불어 환하게 피어났으면 합니다.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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