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권근영의 숨은그림찾기

시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손목시계가 낮 12시 4분을 가리킵니다. 탁상의 디지털 시계가 12시 5분을 빛낼 때, 리처드 기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나게 외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노인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괘종시계를 쳐다봅니다. 그렇게 화면 속에선 시간이 흐릅니다. 지금 몇 시인지 끊임없이 알려주면서…. 크리스천 매클레이의 24시간짜리 영상 작품 ‘시계’<사진> 속 정오 부분입니다. 영화 수천 편 속 시계 장면을 모아 편집했습니다. 낮과 밤이 돌고, 주인공들의 한순간 한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며, 조각들이 편집돼 전체를 이룹니다.

 6명의 조수와 3년 동안 만든 작품, ‘시계’로 매클레이는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습니다. 작품은 세계 유수의 미술관 6곳에 판매됐는데, 동시상영은 불허한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 어디든 한 곳에서만 이 영화가 재깍거리고 있을 텐데, 지금은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입니다. 열혈 관객을 위해 미술관은 가끔 24시간 상영회도 엽니다.

‘시계’의 한 장면. [사진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시계’의 한 장면. [사진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시계’는 실제 시간에 맞춰 상영됩니다. 즉 낮 12시 4분 장면이 나올 때, 관객의 핸드폰이나 손목의 시계 또한 12시 4분을 가리킵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대개 시간을 잊지만, 이 영화를 볼 때 관객들은 흐르는 시간을 한순간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합니다. 영화 속 시간도,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도 엇비슷합니다. 잠에서 깨어나고, 일터로 나가고,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수많은 시간을 공유하며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2), '펄프 픽션'(1994)처럼 유명한 영화도, 콜린 퍼스·알 파치노 같은 친숙한 배우도 나옵니다. 하지만 봤던 영화가 나와도 못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시계’ 속 1만2000여 컷은 영화 속에서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장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이런 작은 것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만듭니다. 우리가 흘려보내는 순간이 그리 사소하지는 않으며, 과거 영화 속 시간이 모여 ‘시계’를 보는 관객의 실제 시간과 만나 현재를 이룬다는 겁니다. 나아가 이 시간이 결국 어디로 흘러갈지, 미래를 생각하게 합니다. 올해 달력도 한 장밖에 안 남았습니다. 1년에 한 번, 시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손에 잡힐 듯 의미를 갖는 때가 다가옵니다.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