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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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지나친 성공이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미국에 이라크가 바로 그런 사례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종전(終戰)을 선언한 후에 미군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다. 벌써 죽었거나, 살아 있다고 해도 정치.군사적으로 식물인간이 돼 있어야 할 사담 후세인의 얼굴 없는 목소리가 미국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저항을 독려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자꾸만 베트남의 악몽을 떠올린다.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이 미군 병사들의 목숨을 계속 앗아가는 묘한 상황으로 부시에 대한 미국인들의 지지도는 가파른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내년 대선에서 재선까지 위협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ABC 여론조사 결과는 부시의 전쟁 방식에 대한 반대가 46%다. 최근 3주 사이에 9%포인트가 뛴 결과다. 반면 부시에 대한 지지는 56%에서 52%로 떨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부시 정부의 위기감이 한국 등 동맹.우방들에 대한 파병 요청으로 나타났다. 부시 대통령이 대단히 이례적으로 한국의 외무장관을 백악관에서 만나 주었다. 윤영관 장관에게 부시는 "내 친구" 노무현 대통령의 안부를 물었다. 방미를 눈앞에 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미국 정부 고위인사들과의 면담 일정이 안 잡혀 초조했다. 그러다 갑자기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같은 사람들과의 일정이 잡혔다. 한국 국회 제1당의 지지 없이 미국이 바라는 수준의 한국군 파병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지난주 워싱턴에서 만난 고위 소식통은 미국이 바라는 한국군 파병의 성격을 폴란드 모델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미국이 바라는 파병의 규모는 적어도 네자리 숫자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섯자리 숫자의 파병을 요청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폴란드 모델은 다른 나라의 병력을 휘하에 편입받아 사단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미국은 지금 101공중강습사단을 귀국시키고 그 역할을 인수할 제2의 폴란드를 찾고 있다. 미국이 당초에 희망한 인도의 파병과 호주의 큰 폭의 추가 파병이 실현될 가능성이 사라진 지금 당연히 미국은 서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부시가 한국 외무장관을 만나주고 울포위츠와 아미티지가 한나라당 대표를 만나는 수선을 떨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청와대에는 부시가 盧대통령을 "내 친구"라고 부른 데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청구서가 날아든 셈이다. 최병렬 대표도 워싱턴에서 부장관급의 고위관리 두 사람을 만나는 방미 성과에 따른 혹을 하나 달고 귀국했다. 내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참으로 부담되는 청구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미국의 요구가 한국더러 101공정대를 대신해 달라는 것이라면 파병 자체에 대한 국내 여론의 반대가 거셀 것은 분명하다.

노무현 정부의 선택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결국은 미국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몇천명 규모의 파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릴 것이다. 파병의 조건을 단다는 것도 국민 설득을 위한 정치적인 수사(修辭)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알맹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한.미 동맹관계의 정신에 따라 파병을 한다는 입장을 밝힌 뒤, 한국군의 주둔지역과 파병 규모를 흥정하는 것이다. 파병의 조건보다는 파병을 주한미군 재배치에 관한 지렛대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청와대 고위관리가 입싸게도 파병 반대의 의견을 말한 것은 간데없는 국제 음치의 행태 그것이다. "그대가 국제정치를 아는가, 한.미 관계를 아는가"라고 묻고 싶다. 파병 반대의 목소리는 당분간 여론의 몫으로 남겨 두는 것이 파병 협상에 도움이 된다.

이라크가 제2의 베트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기우(杞憂)다. 미국은 어쨌거나 후세인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후세인은 호치민이 아니다. 이라크에는 월맹이 없고 베트콩도 없다. 오히려 이라크 사태 안정에 최대의 걸림돌은 이라크 전쟁의 전리품을 독점하겠다는 미국의 한도 끝도 없는 욕심이다. 유엔이 제2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전쟁반대 세력들인 프랑스.독일이 러시아와 함께 이라크 전후 처리에 물리적으로 동참하면 이라크 종전은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