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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북·미 협상 기회의 창 닫히고 있다" 경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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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지난주 한국과의 워킹그룹 회의에서 “지금과 같이 북한이 협상에 응하지 않는 어정쩡한 상태는 계속 갈 수 없다. 기회의 창이 닫히고 있다(Window of opportunity is closing)”고 말했다고 워싱턴의 미 행정부 관계자가 26일(현지시간) 전했다.

[단독] 비건 대표, 지난주 워킹그룹서 "시간만 흐르게 할 순 없다" #협상 응하지 않는 북한에 대한 미국 내 '강경론' 대두 전달한 듯 #2003년에는 '창 닫히고 있다' 발언 두달 뒤 이라크 침공 강행 #북한에 '미국 내 대화파' 움직일 여지 달라는 메시지로 해석돼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왼쪽에서 둘째)이 20일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의 국무부 청사에 도착해 관계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왼쪽에서 둘째)이 20일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의 국무부 청사에 도착해 관계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지난 20일 이도훈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과의 단독 회담 및 워킹그룹 실무진들과의 전체회의를 가졌다. 비건 대표의 ‘창이 닫히고 있다’ 발언은 이 본부장과의 단독 회담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자리에서 비건 대표는 전격 취소됐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간의 뉴욕 고위급 회담을 27~28일 다시 열자는 미측 제안에 대한 북한의 무응답을 거론하며 “미ㆍ북 협상 추진파들도 (미국)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몰리고 있는 데다, 민주당이 하원 다수당이 되면서 이렇게 시간만 흐르게 할 순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소식통은 말했다.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왼쪽)가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를 방문해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대화하고 있는 모습.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왼쪽)가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를 방문해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대화하고 있는 모습.

특히 비건 대표는 “북한은 시간은 자기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그렇지 않다”는 취지로 우려를 표명했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대외적으론 “우린 인내할 준비가 돼 있다”(지난 25일 인터뷰)고 밝혔지만, 미 행정부 내에선 “언제까지나 기다릴 순 없다”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오른쪽)과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대화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다.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오른쪽)과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대화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다.

비건의 직설적인 발언을 놓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통해 북한에 직간접적으로 “북ㆍ미 협상을 지체시켜서 좋을 게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달 7일 폼페이오의 4차 방북 이후 사실상 북ㆍ미 협상을 방치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 “이대로 가면 미국도 협상 창구를 닫고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내놨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 6월 싱가포르 북ㆍ미 정상회담 이후 폼페이오 장관이 4차례나 평양을 찾았지만, 눈에 띄는 성과가 없다는 미국 내 비판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미 정부 관계자는 “대화론자들은 차분한 태도를 보이지만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의심을 품고 있는 강경파들은 ‘어차피 북한과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행정부 내부의 기류를 비건 대표가 솔직히 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창이 닫히고 있다’라는 표현은 과거 긴박한 상황에서 사용된 적이 있다. 조지 W 부시 정권 때인 2003년 1월 28일 존 네그로폰테 유엔주재 미국 대사가 “외교적 해결을 위해 열려 있던 창문이 닫히고 있다”는 말을 내놓은 지 약 두 달 후(3월 20일)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물론 ‘창이 닫히고 있다’는 표현은 워싱턴 외교가에서 흔치 않게 사용돼 온 레토릭이다. 또 트럼프 정부가 북한의 태도에 반발해 당장 대북 군사행동을 준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그럼에도 ‘기회의 창’ 발언은 트럼프 정부 내부에서 강경 압박론이 고개를 들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난 5월말 뉴욕을 방문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왼쪽)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지난 5월말 뉴욕을 방문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왼쪽)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비건 대표의 발언은 현재 국무부 내 대화파가 행정부내 매파에 북한이 대화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과도 연계돼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이와 관련 미 국무부는 한국 측에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과의 협상 주도권을 통일전선부(김영철)와 외교부(최선희) 중 어디로 줄지 최종 결정을 못 했거나, 혹은 미국과 주고받을 협상 카드를 아직 훈령으로 주지 못해 북ㆍ미 회담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듯하다”는 견해를 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협상 공백이 장기화할 경우 미 정부가 사실상 ‘비핵화 협상 중단’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도 덧붙였다.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오른쪽)과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특별대표가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면담을 하고 있는 모습.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오른쪽)과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특별대표가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면담을 하고 있는 모습.

한편 비건 대표는 워킹그룹 회의에서 “대북 제재는 비핵화 전까지 풀지 않는다”는 확고한 원칙을 재차 강조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이에 한국 측은 “연내에 ▶김정은 위원장 서울 답방 ▶종전선언  ▶철도 착공식의 세 가지를 이뤄내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고, 미국 측은 “애써보겠다”는 취지로 답했다. 현재 진행 중인 한ㆍ미 방위비분담금 협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데 대한 미국 측의 강한 우려도 회의에서 전달됐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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