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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경사노위, 경사진 길 잘 굴러갈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가 22일 출범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이 개정 공포(6월)된 지 5개월 만이다. 민주노총의 참여를 기다리다 늦어졌다. 민주노총은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사회적 대타협은 주고 받는 식의 빅딜이 전제 #문 대통령도 "양보와 타협으로 고통분담"강조 #9·15 대타협의 노동계 유리한 사안 이미 시행 #탄력근로제 대타협 합의 사항…노동계 부정 #"경영계는 더 내놓을 게 없는 형편"…난항 예상 #민주노총 합류 불투명, 장외 투쟁 계속 전망 #합의해도 민주노총 반발이 변수될 가능성 #국민연금 개혁 등 휘발성 의제 수두룩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합의안 내놓을 지 주목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식 및 본위원회 1차 회의에서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에게 위촉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식 및 본위원회 1차 회의에서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에게 위촉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사노위는 기존 노사정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사회적 대화 기구다. 노사정위는 노동단체(두 노총)와 경제단체(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상공회의소), 정부로 꾸려졌다. 경사노위에는 기존 노사정위 구성 단체뿐 아니라 소상공인, 비정규직, 여성, 청년, 중소기업, 중견기업도 대화 주체로 참여한다.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 전반의 문제를 다루겠다는 포부를 안고 기구의 성격을 바꿨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빠진 채 개문발차하면서 순항을 기대하긴 힘든 형편이다.

경사노위의 출범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사회적 이슈에 대한 사회적 대타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출범식에서 "경제주체들이 고통을 나누겠다는 마음자세를 당부한다"며 "양보와 타협없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강조한 이유다.

실제로 사회적 대타협은 빅딜이 전제돼야 가능하다. 노동계든 경영계든 양보할 것을 내놓고, 주고 받는 식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2015년 9월 15일 노사정위에서 이뤄진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사회적 대타협(이하 9·15 대타협)'도 그렇게 나왔다.

한데 현 정부 들어 9·15 대타협 중 경영계가 양보한 것만 쏙 빼서 이미 실행에 옮긴 상태다. 차별 시 징벌적 손해배상, 출퇴근 산업재해 인정, 실업급여 지급연장과 지급액 인상, 실업부조제 추진, 최저임금 단계적 현실화, 실근로시간 52시간으로 단축 등이다. 모두 현 정부에서 입법화되거나 정부 주도 아래 시행되고 있다.

반면 9·15 대타협에서 경영계가 요구해 노동계와 합의한 사안은 감감무소식이다. 최저임금의 업종·지역별 차등화, 직무·성과·숙련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 같은 사안이다. 근로시간을 줄이는 대신 탄력근로제를 확대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정부와 정치권이 근로시간을 줄이는 내용의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면서 이것만 쏙 빼놔 갈등이 불거졌다. 노동계는 탄력근로제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노총은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 6개월 연장은 9·15 노사정 대타협 때 한국노총도 동의한 사항'이라는 지적에 "소설"(강훈중 대변인)이라며 기존의 합의 정신조차 부정했다.

노동계는 9·15 노사정 대타협에 따른 과실을 챙길 것 다 챙기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노동계가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설지 의문이다. 경영계가 더는 줄 게 없는 점도 협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이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 등 노동계 요구를 수용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것도 경사노위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전에 경사노위 소위원회를 내세워서다. 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는 ILO 협약 비준을 둘러싸고 노사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20일 '공익위원안'이란 이름으로 ▶5급 이상 공무원과 소방공무원 노조 가입 허용 ▶실업자·해고자 노조가입 허용 ▶노조 전임자 확대 등을 권고했다. 이튿날 청와대와 여당은 전교조 합법화를 포함해 내년 2월 처리를 공언했다. 사회적 대화체인 경사노위가 합의 없이 학자(공익위원)를 동원해 짜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인상을 주는 이유다.

심지어 문성현 위원장은 출범 전날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대해 "잘한 것"이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모 경제단체 관계자가 "완벽하게 기울어진 상태에서 경사노위가 출범하는 꼴"이라고 토로한 이유다.

민주노총과의 관계도 숙제다. 문 대통령은 "자기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는 게 아니라 대화와 타협, 양보와 고통분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사노위 출범 전날 총파업으로 위력시위를 벌인 민주노총을 겨냥한 말이다. 동력은 없었지만 민주노총의 장외 투쟁은 계속될 전망이다. 경사노위에서 설령 일부 사안에 대해 합의를 하더라도 민주노총이 반발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합의 자체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희한한 모양새가 연출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민주노총의 빈자리가 아쉽다"고 한 말에는 이런 우려가 녹아있는 듯 보인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민주노총 지도부에 경사노위 참여를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지도부만 설득한다고 참여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 현 민주노총 지도부는 위원장 선거 당시 사회적 대화 복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런데도 참여하지 못하는 건 집단지도체제여서다. 위원장이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전국의 사업장에서 뽑힌 대의원의 의견이 모아져야 한다. 계파 간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온건파인 현 지도부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다.

여기에다 국민연금 개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는 노동시장 개혁 등 휘발성이 강한 내용이 수두룩하다. 경사노위에서 합의가 난항이 예상되는 정도가 아니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합의문을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미 ILO 핵심 협약 비준을 위한 경사노위 공익위원안을 놓고도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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