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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진원지' 된 靑 청원···美, 150명 동의한 글만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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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수역 폭행사건’ 게시글엔 18일까지 35만여 명이 동참했다. 영상 공개 후엔 ‘남혐’이란 반발도 나왔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 카카오TV 캡처]

‘이수역 폭행사건’ 게시글엔 18일까지 35만여 명이 동참했다. 영상 공개 후엔 ‘남혐’이란 반발도 나왔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 카카오TV 캡처]

이수역 폭행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된 데엔 “화장을 하지 않고 머리가 짧다는 이유만으로 폭행을 당했다”는 14일 청와대 국민청원이 결정적 계기였다. “여성 2명을 무차별 폭행한 가해 남성의 신원을 밝히고 처벌하라”는 동의가 빗발치며 전형적인 ‘여혐’(여성혐오) 사건으로 규정됐다.

‘이수역 폭행’ 되레 갈등 증폭 #행정부 권한 벗어난 요구 많고 #특정단체·개인에 과도한 비난 #국회 입법조사처도 문제점 지적

하지만 18일 현재 경찰 중간수사 결과는 ‘쌍방 폭행’이다. 당초 피해자로 알려진 여성의 폭언 동영상 등이 유포되며 이번엔 ‘남혐’(남성혐오) 사건이라는 반론도 거세다. 당초 사소한 다툼에 그칠 수 있는 해프닝이 ‘청와대 국민청원’이라는 필터링을 거치며 남녀 대결 및 국민적 공분 사태로 에스컬레이터를 탄 꼴이다.

이에 따라 확인되지 않은 일방적 주장만 그대로 실어나르며, 자칫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기제로 전락한 청와대 국민청원을 이참에 손봐야 한다는 여론도 비등해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문을 열었다. “국민과 직접 소통하겠다”는 취지였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 모토로 2011년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시작한 ‘위더피플(We the people)’을 참고했다. 지난해 8월부터 지금까지 34만여 건(하루 700여건)의 청원이 올라왔고, 이 중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은 55건의 청원은 정부 답변을 끌어냈다. “직접 민주주의의 본보기”라는 긍정 평가와 함께 문재인 정부의 최고 히트상품으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이다. 특히 1963년 제정됐지만 사실상 사문화 된 ‘청원법’을 되살렸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역기능에 대한 우려도 이어지고 있다. 무분별한 폭로에 그대로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에 올라온 ‘대구 50대 부부 폭행 사건’도 처음엔 “20대 젊은이가 50대 저희 부모님을 다짜고짜 폭행했다”는 글이 오르면서 ‘패륜 행위’라는 비난과 함께 하루 만에 3만여명이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50대 부부가 먼저 젊은 남성의 뺨을 때린 것으로 드러났고, 법원도 쌍방폭행으로 결론을 내렸다.

신뢰성에 의문이 잇따르자 당장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분열을 야기하는 청원 제도 폐지해달라”는 요청 글이 올라오고 있다. 정치권도 가세해 이준석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1년간 운영돼 온 청원제도가 사회갈등 해소에 단 하나라도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다”며 “평가·개선해야 하고 폐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국회 입법조사처도 16일 청와대 국민청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현행 청와대 국민청원이 행정부 권한 밖에 있는 입법권·사법권 행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사를 특별감사하라”(25만건)는 지난 2월 청원이다. 당시 청와대는 “청원 내용을 대법원에 통지했다”고 답해 삼권분립 훼손 논란을 자초했다.

무엇보다 청와대 국민청원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집단지성이 아닌, 혐오의 공간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그만큼 특정 집단이나 인물에 대한 과도한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청와대 답변까지 이어진 게시글 55건 가운데 23건은 ‘자격박탈 또는 처벌강화’를 요청했다. “김보름·박지우 선수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하라”(61만건), “나경원 의원을 평창올림픽 위원직에서 파면하라”(36만건)는 청원이 대표적이다. 김보름·박지우 선수 자격박탈 청원이 올라왔던 지난 2월엔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조차 “청원 게시판이 분노의 배출창구, 인민재판소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고 말했다.

자연히 혐오 정서에 기댄 청원은 청와대 답변의 필요조건인 20만명 동의를 훌쩍 넘어서곤 했다. “난민법을 폐지하라”(71만건), “공공장소에서 동성애 집회 여는 데 반대한다”(21만건) 등이다. 이에 대해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불만을 표출함으로써 정부가 중재·조정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진입장벽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외부 SNS 계정만 있으면 로그인해 청원할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의 ‘위더피플’은 13세 이상에 한해 이메일과 이름을 입력하고 회원 가입 절차를 거쳐야 한다. 게시글을 쓴다고 곧바로 공개되는 것도 아니다. 이메일을 통해 150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청원 내용이 대중에 공개된다. 반면 답변 기준은 오히려 덜 까다로워 20만명 이상이 동의해야 하는 청와대와 달리 위더피플은 10만명이 넘으면 답변을 한다.

근본적으론 청와대로 집중된 권력을 내려놓아야 현재의 혼탁함을 덜 수 있다는 진단이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청와대 정부라는 말이 공공연한 것처럼 청와대가 모든 국정운영에 일일이 개입해 온 것이 역으로 현재의 과잉 청구를 만들었다”며 “권력 분산이 ‘청와대 국민청원 2.0’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BTS 강제 해체시켜라” 뜨자 “해체 막아달라” … 황당한 팬덤 전쟁터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아이돌 해체’ 같은 황당 요청도 적지 않다.

지난 9월 “방탄소년단을 강제 해체시켜 달라”는 청원 글이 대표적이다. 이 청원이 3000명 이상의 동의를 얻자 곧바로 “방탄소년단 강제 해체를 막아달라”는 반대 게시글 수백건이 올라오는 등 청와대 게시판은 순식간에 팬덤 전쟁터가 됐다.

6월 러시아 월드컵에서 스웨덴과의 본선 1차전을 0대1로 패배한 직후에는 “스웨덴 가구 회사인 이케아를 세무조사해달라”는 청원이 등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장현수를 국가대표에서 영구제명해달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임동욱 한국교통대 교수는 “최소한의 검증 없이 모든 요구를 그대로 노출한다면 본래의 의미가 퇴색한 채 국민청원이 희화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영익·성지원 기자 hany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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