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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칼럼] 세계 글루텐프리 시장 노리는 국산 밀 ‘오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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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라승용 농촌진흥청장

라승용 농촌진흥청장

우리의 토종 밀인 ‘앉은뱅이 밀’이 세계 기아를 구제한 녹색혁명의 주인공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키가 1m에 달하는 일반 밀과 달리 50~80cm로 작아 ‘앉은뱅이 밀’이라고 불린 토종 밀은 우리 농가의 대표적 겨울작물이었다. 일본은 1900년대 초, 수확량이 많고 병충해에 강한 ‘조선 밀(앉은뱅이 밀)’을 주시한 끝에 육종에 활용했다. 미국의 육종가인 노먼 볼로그 박사는 일본에서 찾은 앉은뱅이 밀 계열의 품종과 멕시코의 재래종을 교잡, 다수확이 가능한 신품종을 탄생시켰다.

이 신품종은 세계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분수령이 됐다. 멕시코는 밀 생산량이 이전보다 3배나 증가해 만년 식량부족에서 벗어났고, 밀 수출국으로까지 이름을 올렸다. 개발자인 노먼 볼로그 박사는 멕시코와 동남아시아의 식량문제 해결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우리 토종 밀이 가진 뛰어난 유전자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식량 혁명을 이끈 밀의 출현은 불가능했다. 현재 미국에서 재배되고 있는 밀의 대부분도 ‘앉은뱅이 밀’에 유전자의 뿌리를 두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밀 생산이 많지 않아 밀가루 음식은 고려 시대까지도 궁중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으로 대접받았다. 우리 밀의 생산과 소비는 주식인 쌀에 비해 미미했다. 게다가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밀가루 무상원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며 생산기반 마저 흔들리게 됐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해외의 값싼 밀이 수입돼 수입 의존도는 높아졌으나 막상 1970년대 들어 국내산 밀 생산은 줄었다.

2017년 기준으로 쌀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은 61.8kg 이하로떨어졌지만, 밀은 32kg 이상으로 증가했다. 제2의 주식으로 불리지만 생산기반이 부족해 국산 비율은 1.8%밖에 안 된다. 농촌진흥청은 지난 9월 ‘밀 연구팀’을 신설하고 국내 밀 산업 발전을 견인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밀의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품종개발 및 육종에 노력하며 수확 후 품질관리 및 부가가치 증진에 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이 연구진은 그동안 수확량이 월등한 ‘고소’, 항산화 효능이 기존 밀보다 10배 많은 ‘아리흑’ 등을 개발해 호평을 받았다. 최근엔 국내 대학 및 미국 농업연구청(USDA-ARS)과의 협업 연구를 통해 기능성 밀 ‘오프리(O-free)’를 개발했다. 세계 최초로 유전자 변형이 아닌 인공 교배로 개발된 ‘오프리’는 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단백질인 ‘오메가-5-글리아딘’이 제거된 밀이다. 밀가루 음식 섭취 시 소화가 부담스러웠던 소비자들에게도 안성맞춤이다.

전 세계 글루텐프리 제품 시장은 연간 12조 원에 달하며 해마다 10%씩 증가하고 있다. 안전성을 검증받은 ‘오프리’는 경쟁력을 갖춰 세계시장 진출도 긍정적이다. 우리 ‘앉은뱅이 밀’ 이 오늘, 세계인의 건강을 책임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라승용 농촌진흥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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