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힘… 대전 뒤집고 제주는 초경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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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왼쪽 둘째)를 비롯한 당직자들이 31일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다. 오종택 기자

한나라당의 압승이 굳어져 가던 31일 밤 박근혜 대표는 오히려 말을 아꼈다. 절대 열세로 분류되던 대전을 뒤집고 제주를 초경합으로 이끈 승리의 일등공신이지만 표정이 차분했다. 승리의 일등공신인 박 대표가 염창동 당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개표가 한창이던 오후 8시38분쯤. 노란색 상의와 초콜릿색 바지 정장 차림의 박 대표가 체어맨 승용차에서 내리자 현관에 나와 있던 당직자들은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의료용 살색 테이프를 수술 부위에 붙인 박 대표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당직자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지하 1층 기자실에 마련된 투.개표 상황실에 내려간 박 대표는 "저희 한나라당은 선거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개표 중이니 개표 결과를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라고 짤막하게 인사말을 했다. "국민의 높은 지지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취재진의 거듭된 요청에도 "결과가 다 나온 다음에 말씀 드리겠다"고만 했다. "대전.제주를 다녀왔는데 건강은 어떠냐"는 질문엔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답했다.

박 대표가 상황실에 머무른 시간은 40분 남짓. 옆 자리에 앉은 이재오 원내대표, 김학원 최고위원과 간간이 대화를 나눴을 뿐 시선은 TV의 개표 생중계를 향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지만 승리에 도취한 표정은 아니었다. 초경합 지역인 제주지사 개표 상황이 나올 때면 양손에 깍지를 끼고, 손가락으로 의자를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오후 9시20분쯤 자리를 뜨면서 박 대표는 당직자들에게 "끝까지 잘 지켜보십시오"라고 했다. 1층에서 근무 중이던 당직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곤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박 대표가 그랬듯 한나라당도 차분한 분위기였다.

오후 6시 방송사들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당사는 잠시 술렁거렸다. 11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큰 표차로 앞서고, 초접전 지역인 대전과 제주에서도 미세하나마 앞선다는 예측이었다. 그러나 과거 출구조사 결과 발표 때마다 있어온 환호와 박수, 샴페인은 없었다. 대신 이상할 만큼의 침묵이 당직자들 사이에 흘렀다.

이 원내대표는 인터뷰에서 "개표가 끝난 게 아닌 만큼 최종 결과를 끝까지 지켜보자" "일을 잘해서 준 표가 아니라 일 잘하라고 준 표" "민심이 무섭다는 것을 느끼며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라며 몸을 잔뜩 낮췄다. 다른 당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병국 홍보기획본부장은 "민심이 살벌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열린우리당 처럼 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선거 전부터 압승이 예견돼온 만큼 국민에게 오만하게 보이지 않으려 몸을 낮추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그러나 단순한 표정 관리 차원만은 아닌 듯 싶었다. 한동안 멍한 상태가 지속되다가 저녁식사 후 8시쯤 다시 당사에 모여서야 서로 악수를 하며 승자(勝者)의 활기와 여유를 찾았다. 오후 11시가 가까워지자 이계진 대변인은 "국민을 무시하고 고통에 빠뜨리는 정권이 국민에게 어떤 심판을 받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봤다"는 논평을 냈다.

이정현 부대변인은 예상보다 큰 지지율 차이에 대해 "서울역 앞에서 데모를 하지 않았을 뿐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이이 정도면 민중 봉기 수준"이라고 했다.

서승욱 기자 <sswook@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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