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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추격자 43명, '족보' 4억개 들고 당신 흔적 쫓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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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범죄현장 남긴 4개 지문, 감식반은 순식간에 찾았다

중앙일보-경찰 '가상 범죄현장' 지문 감식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감식반원들이 지난달 31일 서울 내자동 서울경찰청 과학수사 실습장에 남긴 지문을 감식하고 있다. 탁영건 인턴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감식반원들이 지난달 31일 서울 내자동 서울경찰청 과학수사 실습장에 남긴 지문을 감식하고 있다. 탁영건 인턴

“범인의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깁니다”

지난달 31일 서울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의 과학수사 실습 세트장. 실제 범행 상황을 가정해 곳곳이 어지럽혀진 이곳에 과학수사대(KCSI) 감식반원 4명이 들어섰다. 세트장은 거실, 안방, 주방, 화장실로 나눠진 공간에 식탁, 소파, 침대 등 가구들이 배치돼 실제 가정집과 똑같았다.

공들인 '가상범죄 현장' 감쪽 같을 줄 알았지만 

본지 이태윤 기자가 감식반원이 도착하기 전 서울 내자동 서울경찰청 과학수사 실습 세트장에 지문을 남기는 모습. 탁영건 인턴

본지 이태윤 기자가 감식반원이 도착하기 전 서울 내자동 서울경찰청 과학수사 실습 세트장에 지문을 남기는 모습. 탁영건 인턴

감식이 이뤄지기 전 기자는 가상 범행 시나리오에 맞춰 무작위로 서랍 모서리, 전화기, 플라스틱컵, 수도꼭지 등 총 4곳에 지문을 남겨놨다. 감식반에 ‘혼선’을 주기 위해 손을 옷으로 감싼 뒤 장롱과 서랍 등 집안 곳곳을 헤집어 놨다.

현장에 도착한 감식반 최평엽 경사와 장대영 경장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범행 현장의 사진을 찍고 감식에 용이하도록 공간을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열린 서랍장, 식탁 위의 맥주병 등 사람의 흔적이 남은 장소를 찾아내 알파벳 표식을 놓아 구획을 분리하고, 의심이 가는 증거물 옆에는 숫자판을 세워놨다. 이지연 검시조사관이 손전등을 비추면 박성우 경위가 증거물들을 가까이서 촬영했다.

지문 감식반이 광원을 비추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기자의 지문이 상세하게 드러났다. 탁영건 인턴

지문 감식반이 광원을 비추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기자의 지문이 상세하게 드러났다. 탁영건 인턴

이후 범인의 ‘흔적 찾기’는 속전속결이었다. 다목적 조명등(다양한 파장대의 광원을 비춰 지문과 족적을 확인하는 장비)을 증거물 주변에 비추자 육안으론 보이지 않던 지문의 흔적들이 나타났다. 지문감식용 분말과 형광 분말을 증거물들에 뿌린 뒤 감식용 솔로 정리하자 지문의 형태가 더 뚜렷해졌다. 앞서 기자가 몰래 남겨놓은 4개 지문들이 순식간에 모두 ‘발각’됐다. 확보된 지문들은 접착식 테이프에 옮겨져 증거 분석실로 보내졌다. 최 경사는 “사건 현장에서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증거는 지문”이라고 말했다.

4억개 지문 데이터에서 찾아낸 기자의 신원 

지문은 유형에 따라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왼쪽부터 활 모양의 궁상문, 달팽이 모양의 와상문, 말발굽 모양의 제상문. [중앙포토]

지문은 유형에 따라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왼쪽부터 활 모양의 궁상문, 달팽이 모양의 와상문, 말발굽 모양의 제상문. [중앙포토]

잠시 뒤 경찰청 과학수사관리실에서 확보한 지문을 지문검색시스템(AFIS)의 약 4억 개 지문(만 18세 이상 국민)과 대조했다. 확보한 지문을 광원 장비로 확대해 선명하게 처리한 뒤 지문의 유형과 특징점의 모양을 분석ㆍ대조했다. 지문은 활 모양의 궁상문(弓狀紋), 말발굽 모양의 제상문(蹄狀紋), 달팽이 모양의 와상문(渦狀紋)으로 구분되는데 기자의 지문은 와상문으로 밝혀졌다.

경찰청 증거분석반이 확보한 지문을 분석하는 모습. 윤정애 인턴

경찰청 증거분석반이 확보한 지문을 분석하는 모습. 윤정애 인턴

이선자 경찰청 지문감정관이 현장에서 확보한 지문을 분석하고 있다. 윤정애 인턴

이선자 경찰청 지문감정관이 현장에서 확보한 지문을 분석하고 있다. 윤정애 인턴

통상 지문 유형과 함께 특징점 12개 이상이 일치하면 동일인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앞서 세트장에 남긴 지문의 흔적이 비교적 선명했기 때문에 경찰청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된 기자의 지문과 확보한 지문의 특징점은 20개 이상 일치했다. 이선자 경찰청 지문감정관은 “사람마다 고유의 생김새가 있는 지문을 확보했다는 것은 범죄자의 얼굴을 포착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지문은 각종 강력범죄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고 있다. 특히 지문 분석기술이 날로 발전하면서 지문을 확보하고도 오리무중 상태이던 과거 미제사건들이 줄줄이 풀리기도 한다.

지난 2000년 발생한 부산 동래구 오락실 살인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범인은 오락실 화장실에서 종업원 A(39)씨를 흉기로 8차례 찔러 살해한 뒤 금품을 빼앗아 달아났는데, 경찰은 현장에서 피 묻은 ‘조각지문’을 확보하고도 기술 한계로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찰청은 12년 뒤인 2012년 지문을 재감정했고, 손모(44)씨의 지문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손씨는 2014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미제사건 해결하는 지문, 758개 사건 검거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경찰청은 2010년~2017년 발생한 미제사건 5279건에 대한 현장 지문 재검색을 실시했다. 이중 2343건의 신원을 확인해 758개 사건의 용의자들을 검거했다. 살인사건은 7건이 해결됐고, 강도는 72건, 성폭력 사건은 135건이 해결됐다. 특히 범행 당시에는 지문을 등록하지 않은 미성년자였다가, 이후 주민등록을 하면서 검거된 미성년 범죄자도 많았다. 지난해 지문 재검색으로 검거된 용의자 177명(154개 사건) 중 161명이 사건 당시 미성년자였다.

국내 경찰의 지문 감정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매년 2개국 이상을 방문해 현지 경찰청과 과학수사연구소 등에 감정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베테랑 감정관’의 비율도 높다. 국내 지문감정관 43명 가운데 33명이 10년 이상의 경력을 갖고 있다.

조대희 경찰청 증거분석계장은 “깨진 유리병에 묻은 조각지문도 포착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장 감식과 지문 분석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며 “향후 강력 미제사건에서 진범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손국희ㆍ이태윤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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