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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별난 월드컵 앙숙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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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독일-네덜란드전. 네덜란드 수비수 프랑크 레이카르트(FC 바로셀로나 감독)(오른쪽)가 독일의 스트라이커 루디 펠러(전 독일 대표팀 감독)에게 침을 뱉고 있다. [중앙포토]

"잉글랜드가 우승한다면, 그 비극에 대한 정신적 충격은 반드시 보상받아야 한다."-스코틀랜드

"독일에 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독일이 우승하는 것이다."-네덜란드

독일 월드컵에서도 '앙숙' 관계는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평소에도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대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독일과 네덜란드가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 잉글랜드 우승 대비 보험=스코틀랜드인은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인들의 줄기찬 요청에 영국 보험사 브리티시 인슈런스(Britishinsurance.com)는 최근 '잉글랜드가 우승할 경우 100만 파운드(약 17억6000만원)를 지급하는 보험 상품'을 내놓았다. 잉글랜드가 우승할 경우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받을 충격을 보상하는 상품이다. 시몬 버제스 사장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1000계좌 이상이 팔렸다. 지급액이 10억 파운드를 넘어선 순간 판매를 중단해야 했다. 감당할 수 없는 액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서포터스 '타탄 아미'(타탄 군대)는 잉글랜드와 같은 조(B조)의 트리니다드토바고를 응원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타탄 아미는 이미 수천 벌의 트리니다드토바고 유니폼을 준비했다. 스코틀랜드 잭 매코넬 선임장관은 "한때 잉글랜드의 식민지였던 트리니다드토바고를 응원하는 것이 스코틀랜드의 의무"라고 말하기도 했다.

◆ "8강에서 붙자"=아르헨티나와 함께 C조에 소속돼 있는 네덜란드의 축구팬들은 벌써 8강전에서 홈팀 독일을 멋지게 이기기를 고대하고 있다. 네덜란드가 조 1위로 16강에 올라 D조 2위 팀을 꺾고, 독일이 A조 1위로 16강에 올라 B조 2위를 누른다면 두 팀은 8강에서 맞대결한다. 네덜란드인들의 반(反)독일 감정은 유별나다. 네덜란드 응원단은 독일 원정 응원을 위해 오렌지색 독일군 모자를 쓰기로 했다. 2차 세계대전의 '침략자' 독일을 풍자하고 '오렌지 군단'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독일 국기와 독일 고유의 독수리 문장이 새겨진 깔개에 신발을 닦는다는 계획도 세웠다. 한 네덜란드 업체가 독일 월드컵 경기장 12곳 중 8곳에 잔디를 납품하기로 계약하자 네덜란드 언론들은 '일종의 승리'라고 떠들었다.

1988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벌어진 유럽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네덜란드가 독일을 2-1로 이기자 선수단 귀국 당시 전 인구의 60%에 달하는 9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네덜란드 역사상 2차 세계대전 종전일 이후 가장 많은 인파로 기록됐다고 한다.

강인식.임장혁 기자

◆ 왜 앙숙인가=브리튼섬(영국 본토)의 원주민은 앵글로 색슨족(잉글랜드 조상)이 아닌 켈트족(스코틀랜드 조상)이다. 스칸디나비아 지방에 살던 앵글로 색슨족이 브리튼섬으로 넘어와 평야지역을 정복하고 켈트족을 척박한 북쪽 지방으로 밀어냈다.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그레이트 브리튼 통일 왕국으로 통합됐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자존심만은 결코 버릴 수 없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민족 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네덜란드와 독일의 악연은 2차 세계대전 때인 1940년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네덜란드인들의 반독일 감정은 1974년 서독 월드컵 결승전에서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네덜란드가 서독에 1-2로 지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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