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택희의 맛따라기] ‘제주고소리술 익는 집’ 수제 증류주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608호 21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제주고소리술 익는 마을' 수제 소주

이택희의 맛따라기 - ‘제주고소리술 익는 집’ 수제 증류주 #제주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주 #기능보유자 집안서 대물림해 빚어 #제주 햇밀로 누룩 직접 띄워 사용 #“좁쌀 술엔 쌀 술보다 미려한 신맛”

첫 만남이 짜릿했다. 한 모금 머금자 상큼하고 활기찬 신맛이 입안에 퍼졌다. 묵직한 단맛이 바탕에 흐르고, 산뜻한 향이 코끝에 아른거렸다. 샘물처럼 맑은 기운이 맛과 향을 이끌었다. 신맛·단맛이 치밀하고 향은 은은하면서 기운은 청아한, 곡주인데 산미 좋은 내추럴 화이트 와인을 연상시키는, 이런 전통주는 처음이었다.
 7월 18일 초저녁, 전국 ‘찾아가는 양조장’ 34곳의 공식 모임 뒤풀이로 열린 시음회에 참석했다. 전통주 20여 가지를 맛봤다. 가장 호기심을 자극한 술은 ‘오메기 맑은 술(14도)’이었다. 올해 새로 ‘찾아가는 양조장’에 선정된 ‘제주고소리술 익는 집’에서 빚은 제주 전통 청주였다.
 술맛에 끌려 지난달 추석을 앞두고 제주 성읍마을 양조장에 찾아갔다. 10월 16일에는 서울 시음회에서 창업자 김희숙(59·제주 무형문화재 제11호 고소리술 교육전수 조교)씨를 만났고, 23일 양조장에 다시 갔다.

김희숙씨가 오메기술이 담긴 무쇠솥 위에 고소리를 건 뒤 증류시켜 만드는 고소리술을 받고 있다. 신인섭 기자

김희숙씨가 오메기술이 담긴 무쇠솥 위에 고소리를 건 뒤 증류시켜 만드는 고소리술을 받고 있다. 신인섭 기자

김희숙씨가 오메기술이 담긴 무쇠솥 위에 고소리를 건 뒤 증류시켜 만드는 고소리술을 받고 있다. 신인섭 기자

 오메기는 제주 사람의 주곡이던 좁쌀이다. 고소리는 소줏고리의 제주 말이다. 오메기술은 좁쌀·보리쌀에 누룩을 섞어 빚은 발효주이고, 고소리술은 오메기술을 고소리로 내린 증류 소주다. 김씨가 고소리술 내리는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맑은 오메기술 10ℓ가 담긴 무쇠솥에 고소리를 걸고 시룻번을 붙인 다음 불을 지폈다. 10분쯤 지나자 고소리 코(증류주 나오는 곳)에서 술이 몇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가느다란 물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간이 얼마 흐르자 코로 흐르던 술 양은 줄고 증기가 폴폴 나왔다. 냉각수가 데워져 술 증기가 맺히지 않고 분출하는 것이다. 김씨는 장탱이(고소리 머리에 양푼처럼 우묵한 부분)의 물을 찬물로 갈아줬다. 고소리술의 양은 본래 술의 3분의 1가량 나온다고 한다. 증류 작업을 제주에서는 ‘술 닦은다’고 말한다.

맑은 오메기술 증류하면 고소리술

처음 내린 술은 성깔을 있는 대로 다 드러내 독하면서 맛이 거칠고 맵다. 시간이 맛을 다스려 살려낸다. 항아리에 담아 1년 이상 숙성해야 한다. 오래 묵을수록 맛이 순하고 깊어진다. 숙성한 고소리술(40도)을 조금 입에 물고 있으면 단맛이 혀에 깔리면서, 증류 전 오메기술의 특성인 감칠맛과 구수함이 주변을 맴돈다. 그 위로 물이 출렁이며 물방울이 튀듯 다채로운 맛과 향이 펼쳐진다. 도수가 주는 압박보다 맛은 순하고 부드럽다.

김희숙씨(오른쪽)와 며느리인 김소연씨가 수확한 좁쌀을 건조한 뒤 두들켜 털어내고 있다. 신인섭 기자

김희숙씨(오른쪽)와 며느리인 김소연씨가 수확한 좁쌀을 건조한 뒤 두들켜 털어내고 있다. 신인섭 기자

김희숙씨(오른쪽)와 며느리인 김소연씨가 수확한 좁쌀을 건조한 뒤 두들켜 털어내고 있다. 신인섭 기자

 고소리술의 원료인 오메기술은 좁쌀·보리쌀·누룩·물(수돗물)로만 빚는다. 조·보리 비율은 반반. 좁쌀은 껍질[種皮]이 두껍고 전분이 많지 않아 발효 과정이 쌀보다 까다롭다. 7∼8시간 불려 빻은 가루를 익반죽한다. 잘 치대서 손바닥 크기로 넓적한 고리 떡을 빚어 삶는다. 끓는 물에 떡을 넣고 익어서 떠오를 때 나무 곰박(구멍 뚫린 국자)으로 건지면 술떡으로 쓸 오메기떡이 된다. 요즘 팥고물 묻힌 오메기떡은 제주도 기준으로 보면 오메기경단이다.
 떡을 건져 도구리(밑 넓은 나무 함지)에 넣고 뜨거운 게 미지근해질 때까지 덩드렁마께(작은 절굿공이)로 짓이긴다. 삶거나 뜨거울 때 짓이기는 것은 좁쌀의 전분 구조를 풀어주는 작업이다. 김씨는 “술 빚는 과정 중 오메기떡 다루기가 가장 중요하다. 그걸 터득할 때까지 실패도 많이 했고 힘들었다”고 말했다.

 달콤한 감칠맛 은은한 40도 소주

 술떡이 식으면 누룩 가루와 떡 삶은 물을 조금씩 나눠 뿌리면서 치댄다. 그걸 술 항아리에 앉히고 물을 더 부은 다음 온도(25도)를 맞춰 1∼2일 두면 술이 괴기 시작한다. 여기에 조와 보리쌀로 고두밥을 지어 넣고 15∼20일 지나면 발효가 완료된다. 위로 노랗고 진하면서 도수 높은 맑은 술이 뜬다. 이걸 떠내 가라앉히면 ‘오메기 맑은 술’이 된다. 전 과정은 한 달쯤 걸린다.
 “좁쌀 술은 쌀 술보다 미려한 산미가 있고, 감칠맛이 풍부하며, 맛이 다채로워 술이 입에 착 달라붙는다. 누룩을 최소한만 넣고 술을 맑게 빚는 게 요체다. 옛 문헌을 보면 누룩을 많이 썼는데 그러면 누룩 내가 난다. 누룩을 적게 쓰려면 술을 여러 번 익혀야 한다(이양주, 삼양주). 술 속 효모가 배양되도록 영양을 거듭 공급하면 누룩 내 적고 향기롭고 맑은 술이 나온다.”

밀을 거칠게 빻은 밀기울로 만든 누룩에 효모가 피어 흰색 덩어리로 보인다. 술을 만들기 위해 잘게 부숴 놓았다. 신인섭 기자

밀을 거칠게 빻은 밀기울로 만든 누룩에 효모가 피어 흰색 덩어리로 보인다. 술을 만들기 위해 잘게 부숴 놓았다. 신인섭 기자

밀을 거칠게 빻은 밀기울로 만든 누룩에 효모가 피어 흰색 덩어리로 보인다. 술을 만들기 위해 잘게 부숴 놓았다. 신인섭 기자

 김씨가 자신의 술에 대해 설명했다.
술맛·향을 만드는 중심 재료는 누룩이다. 김씨는 밀 누룩을 직접 띄워 쓴다. 띄울 때는 온도가 중요한데, 예전 제주에서는 말복 무렵 띄웠다. 무덥지만 산들바람이 섞여 불어 누룩이 잘 될 때다.
6∼7월 수확한 햇밀을 거칠게 빻아 밀기울을 만들고 물을 부어 치댄다. 물이 고루 배야 누룩이 잘 뜬다. 물기가 모자라면 곰팡이(효모)가 피지 않고, 물이 많이 간 데는 썩는다. 치댄 반죽을 높이 3㎝ 고령착(원형 누룩 틀)에 넣고 헝겊을 덮은 다음 발로 단단하게 디딘다. 단단하지 않으면 뜰 때 열이 나 갈라지고 틈으로 들어간 공기에 잡균이 번식해 누룩에 검거나 푸른곰팡이가 피고 역한 냄새가 난다. 잘 뜨면 노르스름하거나 하얀 곰팡이가 피고 구수한 향이 난다.
 디딘 누룩은 짚이나 콩깍지, 마른 쑥, 씻지 않는 솔잎을 덮으면서 켜켜이 쌓아두면 사흘 뒤부터 열이 오르면서 곰팡이가 핀다. 2∼3일마다 위아래를 뒤집어주며 한 달쯤 지나면 누룩이 완성된다. 다시 2개월쯤 건조·후숙해야 더 힘 있고 좋은 누룩이 된다. 이걸 빻아 낮에 햇볕에 널고 저녁에 이슬 맞히기를 3∼4일 반복하면 잡내가 날아가고 더 하얗게 탈색된다. 이 누룩으로 술을 담그면 맑고 누룩 내가 적다.

고소리술과 오메기술이 항아리에 담겨 숙성되고 있다. 신인섭 기자

고소리술과 오메기술이 항아리에 담겨 숙성되고 있다. 신인섭 기자

고소리술과 오메기술이 항아리에 담겨 숙성되고 있다. 신인섭 기자

 고소리술은 제주 여인네들 맵짠 삶의 애환이 서린 생활문화유산이다. 1960∼80년대에는 단속을 무릅쓰고 집집이 밀주를 내렸다. 여성이 주도하는 가정에서 가장 빠른 현금조달 창구였기 때문이다. 김씨 어머니도 그랬다. 시집에서는 시할머니(고 이성화씨)가 성읍에서 주막을 했다. 술 솜씨를 시어머니 김을정(93) 여사가 물려받아 90년 오메기술(제주 무형문화재 제3호), 95년 고소리술(제주 무형문화재 제11호) 초대 기능보유자가 됐다. 김씨는 시어머니를 도우면서 기능을 익혔다. 지금은 기능보유자 다음 자리인 교육전수조교 위치에 있다. 그 뒤를 동갑인 아들과 며느리 강한샘(30·전수생)·김소연 부부가 4대째 잇고 있다. 술 빚는 과정을 다 보여준 김씨는 항변하듯, 자랑하듯 말했다.
 “고소리가 아니라 기계로 증류하면 고소리술이라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우리는 무형문화재를 지키려고 옛날 방식 그대로 한다. 첨가물 일절 안 넣고, 전 과정 기계 없이 수작업으로 한다. 바꾼 게 있다면 연료를 장작에서 가스로 대체한 것뿐이다. 고소리로 내리는 고소리술은 제주에서 우리 집뿐이다.”

김희숙 씨가 술 판매점 및 교육장으로 사용하는 주택. 카페 겸 시음장 역할도 한다. 신인섭 기자

김희숙 씨가 술 판매점 및 교육장으로 사용하는 주택. 카페 겸 시음장 역할도 한다. 신인섭 기자

김희숙 씨가 술 판매점 및 교육장으로 사용하는 주택. 카페 겸 시음장 역할도 한다. 신인섭 기자

주안상엔 토속음식 메밀고구마범벅·별떡·양하무침·몸국…

‘제주고소리술 익는 집’에 가기 일주일 전 서울 시음회에서 만난 김희숙씨에게 양조장 유료 체험 때 차려내는 토속음식 주안상을 부탁했다. 서너 가지만 요청했는데 9가지나 준비해 상을 차렸다. 제주 향토색이 물씬한 음식들이다. 손맛 좋던 어머니 솜씨를 김씨가 물려받아 준비한 주안상은 외지인 입에도 맛이 착 감겼다.

고소리 술 주안상. 신인섭 기자

고소리 술 주안상. 신인섭 기자

고소리 술 주안상. 신인섭 기자

①메밀고구마범벅 ②별떡 ③고사리나물 ④양하 꽃 무침(생, 데침) ⑤순대 넣은 몸(모자반)국 ⑥튀겨서 양념장 얹은 각재기(전갱이) ⑦불고기 양념 등갈비찜 ⑧매운 고추가 들어간 양파장아찌.
메밀고구마범벅에 먼저 관심이 갔다. 고구마의 옅은 단맛과 메밀의 구수함이 잘 어울리는, 향토색 짙은 별미였다. 이번 가을에 수확한 메밀이라 맛있기도 하지만, 제주 메밀은 육지보다 더 구수한 맛이 있다. 고구마를 깍둑썰기해 소금 넣어 삶고, 메밀가루와 섞어 떡처럼 찐 제주 음식이다. 반죽할 때는 고구마 삶은 뜨거운 물을 이용한다.
별떡은 동그란 찹쌀 부꾸미다. 제사상에 올리는 떡이다. 고사리나물은 4∼5월에 틈날 때마다 직접 꺾어 삶아서 말려 뒀던 걸 다시 삶아 집간장으로 무쳤다. 고사리 대가 튼실하고 살이 많아 육지 고사리보다 맛있다. 양하는 초가 둘레로 낙숫물 떨어지는 자리에 심어 잎과 꽃을 음식에 활용했다. 쌈·나물·국·장아찌로 만들어 먹는 제주 사람의 추억 음식이다. 몸(모자반)국은 돼지 접작뼈(잡뼈)를 푹 고아 모자반 넣고 끓이다가 메밀가루를 살짝 풀었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lee.tackhee@joins.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