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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양호 신드롬' 그의 일갈 "마중물만 넣으니 경제 시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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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지난달 31일 본지와 인터뷰하는 변양호 VIG파트너스 고문. 변 고문은 PC를 업그레이드 하듯이 우리 경제 시스템을 지금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초반에 ’얼굴 나가기 싫은데 사진은 안 찍으면 안 되냐“는 무리한(?) 요청을 해서 잠깐 당황했다. 어쨌든 사진은 찍었다. ’사진은 가능한 한 조그맣게 내달라“는 추가 요청에도 ‘소이부답(笑而不答)’ 할 수밖에 없었다. [임현동 기자]

지난달 31일 본지와 인터뷰하는 변양호 VIG파트너스 고문. 변 고문은 PC를 업그레이드 하듯이 우리 경제 시스템을 지금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초반에 ’얼굴 나가기 싫은데 사진은 안 찍으면 안 되냐“는 무리한(?) 요청을 해서 잠깐 당황했다. 어쨌든 사진은 찍었다. ’사진은 가능한 한 조그맣게 내달라“는 추가 요청에도 ‘소이부답(笑而不答)’ 할 수밖에 없었다. [임현동 기자]

장·차관 출신이 아니면서 가장 유명한 전직 경제관료를 꼽는다면 아마 변양호(64) VIG파트너스(보고펀드) 고문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1급 자리인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났지만 가끔 강연이나 신문 기고를 할 때는 그저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국장 시절 외환은행 매각을 소신 있게 밀어붙였다가 곤욕을 치르면서 본의 아니게 유명해졌다. ‘장관감’ 소리를 듣던 잘나가던 관료의 갑작스러운 불운은 ‘변양호 신드롬’으로 이어졌다. 뒤탈이 두려워 책임을 회피하는 공직사회의 보신주의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경호의 직격 인터뷰] #외국 친구들 “한국 투자 관심없다” #일거리 있어야 일자리도 늘어나 #약자 위해 시장 규칙까지 바꾸면 #역동성 떨어지고 자원배분 왜곡 #두려움 없이 경제활동 할 수 있게 #엔도르핀 넘치는 놀이터 만들자 #선진국 하는 사업 무조건 허용을 #협치로 정책 패키지 합의해야

거시경제 지표는 죽을 쑤고 증시가 요동치며 경제가 총체적인 난국에 빠졌다. 변 고문 생각이 궁금했다. “대가(大家)도 아닌데 내가 무슨…”이라며 인터뷰를 고사하던 그와 어렵게 마주 앉았다. 인터뷰는 지난달 31일 서울 순화동 AIA타워에 있는 VIG파트너스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거시 실물지표가 나빠졌고 증시도 불안하다.
“외국 친구들을 만나면 투자 대상으로 한국에 더 이상 관심 없다고 한다. 우리 경제는 시들고 있다. 잠재성장률을 고려하면 2%대 성장이 어쩔 수 없는 ‘뉴 노멀(새로운 정상상태)’이라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최근 몇 년간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과도하게 낮아졌다. 구조 개혁을 게을리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탓도 있다. 이번 정부 들어 기업이 위축되면서 더 나빠졌다. 하지만 우리도 경제 시스템을 고치면 미국처럼 4% 성장도 할 수 있다.”
지난 9월 바른미래당 연찬회와 10월 국감을 앞두고 김성식 바른미래당 의원과의 대담에서도 시스템 개혁을 강조했다. 소득주도 성장·혁신성장·공정경제라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 기조(목표)는 옳지만 전략(정책 방향)은 비뚤어졌고 전술(정책 수단)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던데.
“이 정부는 공정과 복지 문제를 핵심 경제정책 기조로 내세우는 최초의 정부다. 소득주도 성장은 결국 복지정책이다. 그냥 사회안전망 구축이라고 하면 될 것을 정부가 불필요한 논란만 자초했다. 공정·혁신은 올바른 방향이다. 정부는 혁신성장이라고 하는데 나는 경제자유화라고 표현한다. 결국 내가 강조하는 공정·자유·복지는 이 정부의 목표와 비슷하다.”
전략과 전술이 어떻게 잘못됐나.
“정책 수단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고 있다. 휠 얼라인먼트(wheel alignment·차 바퀴 정렬)가 안 돼 있다. 소득주도 성장이 경제자유화를 해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정경쟁 한다면서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위축시켜서도 안 된다. 목표가 셋이라면 수단도 서로 조화돼야 한다. 혁신은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공정경제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소득주도 성장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각각 영역을 나눠 맡는다는 데, 말도 안 된다.”
최저임금 인상 등 소득주도 성장에 비판이 많다.
“최저임금 인상이 시장의 자원 배분을 왜곡시키는 건 분명하다. 생산성 범위 안에서 올려야 한다. 어려운 사람 도와주자는 취지는 좋다. 게임의 규칙을 어려운 사람에게 유리하게 바꾸자는 게 지금 정책이다. 그 결과는 어려운 사람은 제대로 혜택을 못 받고 잘하는 사람도 손발이 묶여서 잘하지 못하게 한다. 잘하는 사람은 더 잘하게 하고 이들에게 세금 걷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좋아진다.”
지금 정부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고치겠다는 건데.
“그게 틀렸다는 거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규칙을 고치면 경제 역동성이 떨어지고 자원 배분이 왜곡된다. 물론 갑질을 처벌하는 건 좋은 거다. 하지만 잘못도 없는데 그동안 돈을 잘 벌었으니까 손 보는 식이어선 안 된다. 우리는 일 터지면 맨날 대책만 만든다. 선진국처럼 제도와 관행을 만들고 정부가 공정하게 집행하면 된다.”
어떤 게 공정한 것인지.
“우선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재벌 개혁은 집중투표제와 스튜어드십 코드를 활용해 1인 대주주의 전횡을 막는 것이다.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정부가 계속 강조해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없애는 것도 포함된다. 이 원칙을 지키는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면 어떨까”.
경제 자유화는 어떤 그림인가.
“경제활동을 자유화하면 혁신은 저절로 따라온다. 두려움 없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어야 창의와 활력이 생긴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얘기하듯이 경제 현장을 ‘놀이터’로 만들어 엔도르핀이 돌게 해야 한다. 지금처럼 기업이 눈치 봐야 할 게 많으면 경제 활력이 생길 수 없다. 인터넷전문은행·데이터경제 등 규제 몇 개 풀었다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우버도, 스마트팜도 못하는 나라다. 이러고도 안 망하는 게 기적 같다. 수출과 기존 산업이 그나마 버텨준 덕이다. 보이지 않는 규제도 많다. 인·허가 신청뿐만 아니라 관청에 법령의 유권해석을 요청할 때도 사전에 협의해야 한다. 확 바꿔야 한다. 스웨덴이나 싱가포르·중국 등 해외에서 가능한 비즈니스는 우리도 제한 없이 허용해야 한다. 해외의 참고할 만한 나라를 정해놓고 그 나라에서 하는 사업이라는 걸 민원인이 입증하면 우리도 무조건 허용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해외에서 하는 비즈니스를 입증했는데도 허용하지 않는 공무원을 감사원이 문책해야 한다. 일자리 정부라면서 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다. 일자리는 일거리가 있어야 늘어난다. 기업주한테 자유를 줄 때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이다. 노사관계의 유연성이 일자리 늘리는 데 필수라는 건 전 세계에 공유된 이론이고 경험이다.”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을 고수하고 있다.
“가계소득을 늘리기 위해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는 건 매우 비시장주의적 사고방식이다. 기업의 생산성을 높여서 자연스럽게 임금이 올라가도록 해야 하는데 지금 정책은 너무 즉흥적이다. 고용 사정이 나쁘니 재정을 투입해 보조금을 쓰고 공공·단기 일자리를 늘리겠다지만 정부가 재정을 쓰는 데도 계획성이 있어야 한다. 보조금이 일단 들어가면 그게 다 기득권이 된다. 나중에 고치기 힘들고 결국 미래 개혁을 힘들게 한다. 정부는 민간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마중물’이라고 자주 얘기하는데, 마중물을 집어넣었으면 펌프질을 해야 한다. 펌프질은 못 하게 하면서 마중물을 붓는 건 낭비다. 기업이 과도하게 움츠러들지 않도록 해야 할 시점이다.”
변 고문이 말하는 복지, 즉 사회안전망 구축은 어떻게 다른가.
“정부가 특정 프로젝트나 산업·기업에 지원하는 대신, 거기서 일하다가 실직한 개인에게 직접 지원하는 형태로 바꿔야 한다. 일자리를 만들고 특정 산업을 육성하는 건 더 이상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선도사업에 정부가 투자한다는 데 정부가 기술도 모르면서 무엇을 어떻게 선도하겠다는 건가. 정부 실력은 내가 (공직에 있어 봐서) 뻔히 안다. 복지 프로그램은 가능한 한 단순하게 재정비해 전달체계를 명확하게 하고, 기본 생계 보장과 의료·교육·보육 중심으로 정비해야 한다.”
좋은 아이디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부터 하나씩 풀어야 하지 않나.
“한두 개 고친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공정·자유·복지를 모두 담아 패키지로 가야 문제가 해결된다. 상법 하나 개정해서 재벌에게 ‘너만 양보해’라고 해선 안 풀린다. 노동 유연화를 포함해 경직된 노동시장 문제를 풀고, 규제를 풀어 기업의 경제활동 제약을 없애고 과도하게 높은 상속세도 내려야 한다. 공정한 시스템 아래에서 경제 자유화 같은 우파 정책은 더 우파적으로, 복지나 사회안전망 같은 좌파 정책은 더 좌파적으로 추진하면 된다. 그러려면 여야와 보수·진보를 넘어 정책 패키지를 합의해 실현해내는 협치 내지 연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당이 생각하는 연정은 장관 한두 자리 나눠주는 정도지, 야당과 정책까지 합의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훌륭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시스템 개혁을 더 늦추면 안 된다. ‘후진’ 시스템을 그대로 두자는 게 이 나라의 수준이고 실력이면 어쩔 수 없다. 선진국은 못되고 그냥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거다.”
유능한 관료들이 공직을 떠나고 있다. ‘변양호 신드롬’도 여전하다.
“안타깝다. 소신 있게 주장을 폈다가 얻어맞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관료의 존재 이유는 없어진다. 분위기에 주눅 들어 납작 엎드려있다고 관료의 책임이 면제되는 건 아니다. 이대로 가면 나라 망한다고 청와대와 한판 제대로 붙어보기라도 했나.”

변 고문은 지난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안희정 충남지사에 경제정책을 조언했고, 대선 때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의 경제특보를 맡았다.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2005년 공직을 그만둔 이유를 “더 좋은 장관이 되고 싶어서”라고 밝히기도 했다. 지금은 어떤지 물었다. “정치인을 도왔던 건 내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싶어서였을 뿐이다. 공직을 맡지 않는 조건으로 그들을 도왔다. 내게 공직은 더 이상 매력이 없다. 능력도, 자질도 부족하다.”

변 고문 사무실 책상 위엔 책 여러 권이 쌓여 있었다. 이헌재 전 부총리가 추천해 공원국 작가의 10권짜리 『춘추전국이야기』를 읽었다고 했다. 그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을 소개했다. “전략과 전술은 명확히 구분해야 하고, 전술적 성공이 오히려 전략적인 실패를 부를 수 있다. 국가라는 조직은 너무 커서 전술적인 실험대상이 될 수 없다. 국가는 언제나 검증된 전략으로 운영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1일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했다. 소득주도 성장 등 기존 정책기조 유지와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변 고문과 다시 통화했다. “2%대 저성장의 고착화를 막기 위한 방법이 왜 재정 확대밖에 없나. 대통령 주변의 사고가 너무 편협하다.”

변양호 전 국장은 …

1954년 서울생. 경기고·서울대 무역학과·노던일리노이대 경제학 석·박사. 행시 19회에 수석 합격하고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국제금융국·경제정책국에서 일했다. 국제금융국 주무과장인 국제금융과장과 최장수 금융정책국장을 지냈다. 2006년부터 4년 넘게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지만 1, 2, 3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현대차 계열사의 채무 탕감 로비 의혹사건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5년 공직을 던지고 우리나라 토종 사모펀드 1호인 보고펀드를 설립했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