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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강수 논설위원이 간다

"모자 눌러쓰고 산에만 다닌다" 양승태 흔적 추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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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적폐·부역 판사’ 난무…광풍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지난달 3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경기 성남시 자택 전경. 7년여 전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그를 인터뷰하려고 찾아갔을 때와 비교해보니 집은 그대로인데 주인은 없었다. [조강수 기자]

지난달 3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경기 성남시 자택 전경. 7년여 전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그를 인터뷰하려고 찾아갔을 때와 비교해보니 집은 그대로인데 주인은 없었다. [조강수 기자]

지난주 사법 농단 의혹의 ‘키맨’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됐다. 나흘 뒤엔 청와대와 사법부 간 재판 거래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됐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을 둘러싼 논란에 대법원 전원합의체 발(發) 종지부가 찍혔다. 판결은 선고됐지만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 외에 ‘권리 위에 잠잔’ 이들의 청구권 소멸 여부는 뜨거운 감자다. 향후 검찰 수사는 임종헌의 구속영장에 직권남용 등의 공범으로 적시한 전직 법원행정처장들을 거쳐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향해 속도를 낼 것이다. 지난 6월부터 암행 중인 양 전 대법원장의 흔적을 추적했다. 서초동 법조타운을 찾아 판사들의 속살도 들여다봤다.

[조강수 논설위원이 간다] #양 전 대법원장, 집에도 못 들어와 #"재판 거래 모르고 사후보고 받아” #사돈 김승규, 지인에 "특별재판부 #설치는 독재국가나 가능한 일” #겪어보니 검찰 수사 횡포 알겠다 #공식 모임 안 하고 ‘혼밥’ 판사도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 1호 대법정. 13명의 대법관이 착석하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2013다61381’ 손해배상 사건의 주문을 읽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0여분. 기다린 세월 13년여에 비하면 찰나였다. 방청석 맨 앞자리에 백발이 듬성듬성한 94세 이춘식옹이 휠체어에 탄 채 선고를 지켜봤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결론은 다수의견 7, 별개의견 2+2, 반대의견 2로 갈렸다. 법리가 간단치 않았음을 방증한다. 11명의 대법관이 징용 피해자들의 내팽겨쳐졌던 인권과 지체된 정의 바로세우기 쪽에 섰다면 2명의 대법관은 합리적 법리 쪽에 섰다.

그 시각, 양 전 대법원장과 행정처장을 지낸 대법관들은 바로 아래층의 법원 전시관 벽면에 사진으로 박제돼 있었다. 직접 묻고 싶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차한성 전 법원행정처장이 대책회동을 하고 수년간 ‘미뤄 조짐’(※작가 정을병의 소설 『육조지』에는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 조진다’고 나옴)으로써 정의가 지체됐다는 검찰의 혐의가 사실이냐고?

당사자인 양 전 대법원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의 소식을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고 추정되는 인사가 떠올랐다. 사돈인 김승규 전 법무장관이다. 김 전 장관이 몸담고 있는 L법무법인의 형사 전문 변호사들이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을 담당하며 대응 전략을 짜고 있으니 직통일 것이라 판단했다. 어렵사리 통화가 됐지만 “아이고, 기자들이 무서워~”라는 말만 반복했다. 검찰이 사돈을 임종헌의 공범으로 적시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나는 전혀 몰라”를 세 번 외쳤다. 노무현 정부 때 법무장관에 이어 국가정보원장까지 지낸 분이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럴까, 잠시 생각했다. 다음날 오후 사무실로 찾아갔으나 “방금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시작해 오늘은 뵙기 어렵다”는 비서의 전갈을 받았다. 이후 지인이 자신과 김 전 장관과의 대화 내용을 보내와 심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네 어귀에 자리잡은 시위대 천막. 내부는 비어 있었다. [조강수 기자]

동네 어귀에 자리잡은 시위대 천막. 내부는 비어 있었다. [조강수 기자]

사법부, 특히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권위와 기능을 상실한 듯해 마음이 아픕니다.
“윤석열(서울중앙지검장)이 왜 그래요? 검찰 수사가 대법원을 향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재판 거래 의혹, 전직 대법원장의 비자금 의혹이라니….”
사법농단 특별재판부 설치 문제는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닌데, 걱정입니다.
“무슨 인민재판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최고 법원 무시하고 여론으로 재단하겠다? 이건 독재국가나 가능한 얘기예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사돈 됩니다. 요즘 근황을 아시는지요.
“우리가 그래서 더 연락 못 하고 있어요. 가슴이 아픕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집에도 못 들어가고 어디서 지내고 뭘 먹는지 물어보기도 어려워요. 가끔 연락은 옵니다만 마음이 아파서 물어볼 수도 없어요. MB(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미국까지 쫓아와서 대법원장 맡아달라고 간청하는 통에 맡았다가 이런 험한 꼴을 당해요.”

허탕을 치고 돌아가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웬 우연? 오래 못 봤지만 아는 얼굴이 눈에 확 들어온다. 양 전 대법원장 사건에 관여 중인 검사장 출신의 L변호사다. 그는 양 전 대법원장이 임종헌을 두고 “자기가 죽을 둥 살 둥 일하고 밑에도 그리 일을 시키는 후배 판사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어 여권이 밀어붙이고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지원사격 중인 특별재판부 역시 위헌 소송에 휘말리게 될 것이고 종국엔 그 판결도 무효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자의 질문과 변호사의 답변은 코엑스 지하보도를 걸으며 끊길 듯 이어졌다. 그는 “돈을 받은 것도 없고 사익을 추구한 것도 아닌데 직권남용이라는 모호한 법률로 전직 대법원장을 옭아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 포토라인에 서게 되면 ‘정책 추진(상고법원 설립)한 것은 맞다. 그 과정에서 잘못이 있다면 내게 책임을 물어라. 사태가 이렇게 돼 후배 법관들에게 미안하다’는 정도의 짧은 멘트를 하라고 조언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두고 있는 공범 혐의는 공보관실 운영비로 비자금 조성, 법관 사찰, 헌법재판소 기밀 유출, 한정위헌제청 결정 번복 등이다. 이와 관련해 양 전 대법원장 측의 한 인사는 “지난번 기자회견 때 송광수 전 검찰총장처럼 ‘차라리 내 목을 쳐라’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게 낫지 않았겠느냐는 얘기가 있었다”며 “하지만 보고를 받았더라도 사후보고였기 때문에 죄가 된다고 생각지는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임종헌의 구속영장 범죄 사실에선 대법원 재판 거래 의혹의 대표 사례로 지목됐던 일제 강제징용 판결 관련 직권남용 혐의는 빠진 것으로 드러났다. “임종헌의 범죄 사실 중 직권남용은 97건인데 이중 강제징용 사건 관련 보고서 10건 등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부적절하게 보고서를 쓰게 한 게 69건이고 가토 다쓰야 산케이 신문 기자 사건, 판사 뒷조사 등 판사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게 25건, 재판연구관에 대한 직권남용이 2건 등이다. 그런데 1, 2심에 영향을 준 재판 관여는 나오지만 사실상 본류에 해당하는 대법원 재판 거래 의혹은 입증한 게 없다.”(황정근 변호사)

저녁 무렵.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의 그 ‘언덕 위 하얀 집’으로 갔다. 7년 2개월 전, 미국 존무어 트레일 도중 대법원장 지명 소식을 접하고 귀국한 양승태 지명자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았던 곳이다. 집은 그대로인데 주인이 없었다. 사진 몇 장 찍고 돌아서려는데 차고의 불이 켜지고 스포츠 가방을 든 사람이 쓱 나왔다.

여기 사나.
“아니다. 집 관리인이다.”

그는 법원 공무원을 23년 정도 하다가 명예퇴직했고 상도동에 살고 있단다.

양 전 대법원장이 집에 왜 안 오나.
“시위대가 깡통 30여개를 묶어 끌고 다니며 하도 시끄럽게 하는 데다 일부 기자들이 길 가는데 옷 붙잡거나 차로 막고 못 가게 하는 일이 있었다. 최근엔 어떤 여성이 정문을 따고 들어와 한 시간 동안 정원에서 담배 피우고 소란을 떨었다. 경찰이 연행해 가려다 ‘우울증 환자’라고 주장하자 웃더라. 대법원장님이 불편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안 오신다. 원래 시위대 천막이 2개였는데 하나로 줄었고 마을 어귀에 있다. 임종헌 전 차장이 구속되니깐 좀 조용해졌다.”
대법원장은 어떻게 지내나.
“모자 눌러 쓰고 산에만 다닌다. 가까운 산보다 멀리 지방으로 가는 것으로 안다. 살이 많이 빠졌다. 앞으로 한국에서 살기도 힘들지 않겠나. 우리나라에 재판받은 사람 얼마나 많나. 그중에 반은 이겼고 반은 졌잖아. 그 진 사람들은 다 해코지하려 들지 않겠나.”
집 관리는 주로 뭘 하나.
“날씨가 추워지니까 보일러도 봐 드려야 하고. 원장님이 차고 키를 나한테 주셨다. 가끔 사모님이 와서 살림살이 가방 바꿔 간다. 며칠 전 어떤 기자가 ‘대법원장님이 내장산에 계신다는 데 맞느냐’고 전화 와서 놀랐다. 원장님이 기자 전화 다 수신 거부해 놓으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저기 저거 감시카메라 안 보이나. 제주도에서도 집 주변 다 볼 수 있다.” 그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요즘 서초동 법조타운의 밤은 삭막하다. 밤 9시만 되면 고요한 거리로 변한다. 판·검사들이 어울리지 않은 지는 오래됐다. 혼밥을 먹는 판사도 늘었다. 모임을 하더라도 서초동을 벗어나 이태원이나 한남동, 강남역, 가로수길, 강북 등으로 간다. 음식점도 룸이 있는, 프라이빗한 공간을 선호한다. 서울고법의 A판사는 “사법부 내부 문제로 혼란스러워 회식 등 모임을 안 한다”며 “징계 청구, 조사받는 판사 적지 않아 서로 마음 다칠까 봐 조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근 카페의 여사장은 “그동안 경기에 상관없이 단골 고객들이 있었는데 사법부 수사가 시작되고 나서 판·검사 분들의 발이 뚝 끊겼다. 개업한 지 22년 만에 이런 심각한 상황은 처음”이라고 하소연했다.

변호사들도 난리다. 지청장 출신 한 변호사는 “서울중앙지검이 적폐 수사에만 올인하다 보니 다른 사건은 씨가 말랐다”며 “작년에 검찰에 송치된 모텔업주 관련 사건을 10개월이 지나도록 처리를 하지 않더라”고 말했다.

편가르기도 심해졌다. 법원 내부에선 “성골이었던 법원행정처 근무 판사들이 하루아침에 적폐 연루 및 부역 판사로 전락하고 행정처 경험이 없는 특정 모임 소속 소장 판사들은 6두품으로 분류되는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특히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80여명의 판사들 중 흠집이 크게 난 판사들은 주홍글씨가 찍힌 셈이라는 말도 돈다. 방희선 변호사는 “지금은 사법의 전복 시대”라며 “민변 출신 변호사가 요직을 독식하고 대법관은 고법 부장판사,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지방법원 부장판사에서 쏙쏙 뽑아가는 바람에 대법관 후보에조차 못 오르는 법원장들은 허당의 장식품이 돼 조직의 틀이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고검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검찰에 닥칠 부메랑을 걱정했다. “그나저나 검찰이 더 걱정이다. 법원은 인적 청산을 하고 나면 권위를 다시 회복할 것이지만 검찰 수사는 필시 제약을 받게 될 거다. 조사받고 나온 판사들이 하나같이 검찰 조서가 왜곡돼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 말은 했으나 뉘앙스와 취지가 확 달라져 있더라는 것이다. 지금 적폐 수사팀이 기고만장하다. 덤터기는 후배들이 쓸 것이다.”

판결로 말한다던 판사들의 코트넷 글 반격은 그게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예고한다. 최인석 울산지법원장, 김시철 서울고법 부장판사, 김태규 울산지법 부장판사 등 여러 직급의 판사들이 검찰의 밤샘수사, 무분별한 압수수색, 반인권적 행위 등을 잇따라 지적하고 나섰다. 이들은 “조직적 반발이 아니다. 판사들이 직접 검찰 조사를 받고 보니 조서를 꾸민다는 게 뭔지를 알게 됐다. 국가정보원 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변창훈 검사가 오죽하면 자살했는지 이해가 가더라. 이번에 조사받은 여판사들 중에 자괴감으로 우는 판사도 있었다”고 말했다. 한 판사는 “임종헌 전 차장에 대해선 묵비권 행사한다고 가족 면회 금지 차원에서 매일 불러 조지기를 하고 있다”며 “시간이 지나면 이번 일이 형사사법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스마트폰부터 뒤져 오늘은 무슨 일 터졌나부터 보는 판사들이 적지 않단다. “집에 가도 그렇고 친구들 만나도 죄인 신세여. 법정 들어가서 당사자들한테 미안하고. 양승태나 임종헌이나 다 책임이 없다고 하는 판인데 지금 김명수 대법원장이나 안철상 법원행정처장도 크게 차이가 안 나니깐 후배들의 실망이 커. 아이고, 혼란이여. 지금 사법부가 광풍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어. 평시가 되면 그때 그런 일도 있었지라고 할 날이 오겠지?” 현직 판사의 넋두리가 가슴을 친다.

조강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