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유지노사할린스크="최철주" 특파원>『오늘은 기념할만한 날이요. 당신은 사할린에 발을 디딘 최초의 남조선 사람이요.』모스크바에서 8시간 비행 끝에 여객기 트랩에서 내리는 기자에게 털모자를 깊숙이 쓴 러시아 남자가 다가오며 말문을 열었다.
사할린 주 인민대의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세르게이·그린코」보좌관이었다.
바로 뒤이어 국경경비대 병사가 재빠른 동작으로 달러와 여권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여행 목적은?』
『취재입니다.』
『우리는 규칙상 외국인의 방문을 기록할 뿐입니다.』그는 여권·비자를 몇차례 확인하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오던 길로 총총히 사라졌다.
『왔다. 왔다. 사할린에 왔다.』시내로 들어가는 차 속에서야 내가 역사의 현장 속에 무사히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강원도 옛 탄광촌에서 익히 보아왔던 일본식 구조의 엇비슷한 집들이 몇채 눈에 들어왔다.
사할린 호텔에서 채 짐을 풀기도전에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남조선 동무요? 맞제-.』여자 목소리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기자 동무지요?』라고 다그쳐 묻는 말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수화기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와』하고 환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말이지예, 남조선 기자 온다고 온통 화제라예. 오늘 식당도 덤벙덤벙 해치우고 기자 동무 만나려고 일찍 가기로 했어예. 좀 기다리시소.』내 머리에서 발바닥으로 찡하게 전류가 흘렀다. 다른 사람이 전화에 나왔다.
『정말 남조선에서 왔습니까. 거짓말 아니지요? 아이고-.』그녀의 말은 감탄인지 비탄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격해 있었다.
그녀는 이름조차 대지 못했다. 또 한 사람은 옆집의 식당도 기자를 만나기 위해 문닫는 시간을 앞당기기로 했다고 전했다.
5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그렇게도 무심하게 흘렀다. 1939년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사할린에까지 한국인들을 강제징용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들의 대부분이 조국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별리의 세월을 보냈다.
「남조선서 기자가 왔다」-그들은 나에게 소리지르고 울고 웃으며 껴안다가 잡아당기고 또는 손을 비틀었다. 그들은 본능적이고도 원초적인 한국적 감정을 표출해 기자를 목메게 했다. 3세보다는 2세가, 그리고 2세보다는 1세의 감정표현이 더 짙었다.
『나 남조선 올림픽사진 보고 며칠밤 울고 또 울었소.』이기철 할아버지 (75) 는 길에서 대성통곡했다.
그는『내 조국, 내 조국이 보고 싶다』고 기자의 가슴팍을 쳤다.
유지노사할린스크 시 공산당위원회 집회소를 취재하고 나온 기자는 길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많은 교포들로 포위되고 말았다. 영하 15도의 추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었다.『내 혈육 곧 만날 수 있어요?』
『우리는 언제 남조선을 방문할 수 있습니까?』『남조선정부는 무엇을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나 살날 얼마 남지 않았소. 내 생전에 조선을 갈수 있겠소?』
그들은 전후 44년 동안 쌓아두고 묻어두었던 궁금증들을 봇물처럼 흘려 내보냈다. 뒤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기자를 겹겹이 싸고있는 앞사람들에게 제발 앉으라고 소리쳤다. 나중에는 그마저 소용없었던지『기자동무, 거 목소리 좀 높여 이야기하시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한 할머니는 기자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남조선사람 보니 고향에라도 갔다온 것 같구마』하고 어루만졌다.
죄어드는 교포들 때문에 메모는 엄두도 못 냈다. 다음 취재를 위해 현장을 떠나야 했으나 빠져나갈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명의 청년들이『자, 짐 갑니다』라고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와 겨우 나를 탈출시켰다.
사할린 중앙시장에서 김치를 파는 30여명의 교포 아주머니들도 기자를 보더니 물건들을 팽개친 채 모이기 시작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러시아인들도 덩달아 모였다. 교포 아주머니들은 포장지 등을 북북 찢어 쓰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운 탓으로 볼펜조차 제대로 써지지 않았으나 그들은 호호 불어가며 자기 핏줄을 찾아 달라고 한국연고지 주소를 적어주었다.
『기자선생님, 까마귀도 자기동네 까마귀는 알아본답디다. 그런데 우리는 뭐요? 내 친척이 조선 어디에 있는지.』
50대의 이 아주머니는 거친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되돌아가버렸다. 나는 그를 취재하기 위해 몇차례 수소문했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소련>
<남조선 기자가 왔단다 조국은 나를 잊었나요>(1)사할린 교포들의 망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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