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북·미의 동네북 된 대기업 … 정부는 더 이상 참견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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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 대사관이 그룹 총수가 평양을 방문했던 대기업들에 전화해 대북 사업의 추진 상황을 물었다고 한다. 방북 때 논의됐던 협력 사업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아본다는 게 표면상 이유였다지만 듣는 쪽은 다를 수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가 철저한 대북제재 이행을 공언하는 터라 “잘못하면 세컨더리 보이콧에 걸릴 수 있다”고 겁주는 것으로 들렸음 직하다.

외국 정부가, 그것도 부처가 아닌 해외 공관이 주재국 기업에 으름장을 놓는 건 있을 수 없다. 협조나 문의할 사안이 있으면 외교부를 통해 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이를 모를 리 없는 미 대사관이 이렇게까지 나온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정부를 통해서는 “너무 앞서가지 말라”는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을 거라고 봤을 공산이 크다.

대기업 측이 겪은 수모는 이뿐이 아니었다. 지난달 평양에선 총수들과 함께 식사하던 이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라고 이들에게 면박을 줬다고 한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북측에서 남북관계에 속도를 냈으면 하는 게 있다”며 감싸려 했지만 먼 길을 온 손님에게 이런 무례가 없다. 죄 없는 대기업들이 남북 경제 교류를 바라는 정부와 북한을 옥죄려는 미국 사이에 끼여 애꿎게 동네북 신세가 된 것이다.

모욕하고 몰아붙인 당사자들은 따로 있지만, 대기업들을 이런 처지에 빠뜨린 도의적 책임은 정부가 져야 한다. 문 대통령을 따라 그룹 총수가 평양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총수의 방북부터 대북 사업 참여 여부까지, 모두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판에 이를 앞장서 헤쳐나가야 할 기업들에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해선 안 된다. 이제부터라도 기업이 경제 논리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도록 정부는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