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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공포 마케팅’ 앞세운 정부 저출산 대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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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승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승호 복지팀 기자

이승호 복지팀 기자

“저출산으로 국가적 재앙이 발생한다는 ‘공포 마케팅’을 앞세워 개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25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산하 민간 전문가 그룹인 ‘재구조화 비전팀’이 정부의 저출산 대책에 대해 내놓은 평가다. 저출산 원인에 대한 고민 없이 경제성장 둔화, 부양부담 증가 등 국가적 위기만 강조했다는 거다.

대표적 사례가 목표 출산율이다. 정부가 5년 단위로 내놓는 이 수치로 인해 각 부처는 단기에 실현할 수 있는 지원 정책에만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실제 효과와 무관하거나 정책 관련성이 적은 사업도 저출산 대책에 포함됐다. 2006년부터 올해까지 153조원의 예산을 쏟아붓고도 ‘효과 없는 백화점식 정책’이란 비판만 듣는 이유다. 선진국에선 1970년대 프랑스와 룩셈부르크 외엔 목표 출산율을 정한 적이 없다. 비전팀은 “목표 출산율 설정 자체가 정부의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 부족과 국가주의적 인식을 드러낸다”며 “출산율 향상만 추구했단 점에서 지금까지의 저출산 정책은 실패”라고 규정했다.

지난 2월 서울의 한 산부인과 병원 신생아실에서 간호사들이 아기를 돌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 서울의 한 산부인과 병원 신생아실에서 간호사들이 아기를 돌보고 있다. [연합뉴스]

비전팀이 꼽은 저출산의 핵심 문제는 ‘삶의 질’과 ‘성평등’이다. 한국에서 결혼은 여전히 출산의 전제조건이다. 결혼하려면 취업부터 해야 한다. 청년실업률은 10%에 육박한다. 그냥 일자리가 아니라 ‘괜찮은 일자리’여야 한다. 취업해도 비정규직 신분의 낮은 소득으론 결혼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이 모든 게 해결돼도 높은 집값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여성에겐 결혼은 행복이 아닌 ‘리스크’ 다. 출산 및 양육 환경 개선은 더디다. 초저출산 국가로 꼽히는 한국과 일본의 성 격차지수(GGI)는 100위권 밖이다. 인구대체 출산율이 2명에 가까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20위권 안에 있다. 비전팀 윤흥식 인하대 교수의 “저출산은 현재 한국사회 상황에 가장 최적화된 행동”이란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다.

문제는 해결책이다. 비전팀은 안정적 일자리 공급에 예산을 더 투입하고, ‘사회서비스원’을 세워 국가가 돌봄 인력을 운영하자고 제안한다. 재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보다 낮은 개인소득세와 부가가치세 증세로 마련하자고 한다.

물론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비전팀의 제안이 모두 적절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저출산은 국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출산이 한국사회의 다양한 문제로 나타난 ‘결과’라는 점을 인식해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잡힌다.

이승호 복지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