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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 최후의 보루 연기금, 이번엔 가장 먼저 발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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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 주식시장을 덮쳤다. 전 세계 금융시장으로 번진 공포에 외국인과 개인투자자는 ‘팔자’만 외쳤고 주가지수는 반 토막이 났다. 주가가 급락할 때마다 연기금은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쏟아지는 대량의 매물을 나 홀로 받아내며 버팀목 역할을 했다. 2011년 그리스발 유럽 재정위기로 증시가 추락할 때도 연기금은 안전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008년과 2011년 증시 급락 구원투수 역할 연기금 #각각 9조, 13조 국내 주식 순매수하며 주가 방어 #올해는 달라져, 10월 증시 위기에 앞다퉈 주식 매도 #저조한 수익률 발등의 불, 변동 큰 국내주식 비중 축소

2008년 코스피가 900대로 반 토막이 날 때도 연기금은 국내 주식을 꾸준히 사들였고 그해에만 9조7763억원을 순매수했다. 유럽 재정위기가 발발한 2011년에도 13조4958억원을 순매수하며 증시를 방어했다.

#. 24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한경호 지방행정공제회 이사장 간담회. 행정공제회는 지난해 10.9%의 운용 수익률을 올렸다. 주요 연기금 가운데 유일하게 두 자릿수 수익을 냈다. 한 이사장은 다른 연기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50% 이상의 대체투자(부동산ㆍ인프라 등) 비율을 수익률의 비결로 꼽았다. 대신 그는 “지난해 18%였던 총자산 대비 국내 주식 비중을 올해 9월 14%까지 낮췄다. 이 비율을 내년엔 더 낮출 계획”이라고 말했다.

변동성이 높고 ‘좁은 시장’인 국내 증시 대신 대체투자와 해외 투자를 늘려가겠단 얘기다. 행정공제회만의 선택이 아니다. 기금 적립금 643조원의 국내 최대 연기금 국민연금은 지난 5월 공개한 ‘중기자산배분안’을 통해 올 7월 기준 19.1%인 국내 주식 투자 비율을 내년부터 2023년 사이 15% 안팎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2008년과 2011년 한국 증시에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했던 연기금이 이제는 달라졌다. 국내 증시에서 앞서 탈출 중이다. 사진은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연합뉴스]

2008년과 2011년 한국 증시에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했던 연기금이 이제는 달라졌다. 국내 증시에서 앞서 탈출 중이다. 사진은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연합뉴스]

연기금은 위탁받은 공공의 자금을 운용하는 곳을 말한다. 국민연금이 대표적이다. 공무원연금ㆍ군인연금ㆍ사학연금 같은 연금공단과 행정공제회, 교직원공제회 등 공제회도 연기금에 들어간다.

위기 때마다 ‘증시 안전판’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연기금이 달라졌다. 무역 전쟁 불안을 가중시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날 선 발언과 금리 추가 인상을 강하게 시사하는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양동 작전에 25일 코스피는 장중 2050선 아래까지 밀렸다. 2100선이 전날 무너진 데 이어 이제 2000선 붕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2008년과 2011년 위기 때와 지금, 연기금의 움직임은 크게 바뀌었다. 더는 연기금은 구원 투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증권ㆍ은행ㆍ보험 같은 국내 다른 기관투자가나 개인투자자가 살 때도 연기금은 한국 주식을 던졌다. 최근 국내 증시 하락의 ‘주범’인 외국인 투자자와 같이 경쟁적으로 투매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2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연기금은 이달 1일부터 24일까지 코스피와 코스닥 시장에서 1309억원어치 주식을 팔았다(순매도). 이 기간 개인투자자는 3조1579억원을 순매수했고, 연기금에 다른 기관투자가까지 포함하면 6678억원 순매수를 기록했다. 다른 기관과 달리 연기금만 순매도에 나섰다.

운용 수익률 하락에 직면한 연기금은 변동성이 높은 국내 주식 비중을 앞다퉈 줄이는 중이다. [중앙포토]

운용 수익률 하락에 직면한 연기금은 변동성이 높은 국내 주식 비중을 앞다퉈 줄이는 중이다. [중앙포토]

이달 들어 24일까지 외국인은 4조원 국내 주식을 팔아치웠다. 연기금은 국내 다른 기관이나 개인과 달리 외국인의 행보에 동참했다. 국내 증시 위기 상황에서 연기금부터 앞서 탈출에 나섰다는 의미다.

이유는 분명하다. 국내 증시를 걱정하기엔 연기금 발등의 떨어진 불이 더 문제여서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주요 연기금은 저조한 수익률로 뭇매를 맞고 있다. 올 7월 현재 국민연금의 전체 운용 수익률은 1%대로 추락했고 국내 주식 운용 수익률은 -6.11%로 추락했다. 수익률 방어를 위해선 국내 증시 탈출이 우선인 상황이다.

‘증시 최후의 보루’로서 연기금은 기대하기 힘들고, 그동안 외국인의 투매 물량을 받아냈던 개인투자자도 등을 돌리는 중이다. 추락하는 증시의 바닥을 예상하기 힘든 이유다.

김영환 KB증권 연구원은 “미ㆍ중 무역 갈등에 따른 기업 비용 증가 우려,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상 사이클에 따른 미국 금리 상승, 이탈리아발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 위험 가능성, 중국 경기 둔화라는 악재에 노출돼 있다”며 “코스피 실적 전망에 하향에 따른 추가 조정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전망했다.

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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