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다 같이 잘사는 지상낙원을 이룬다고? 단 하나의 절대권력자가 되고픈 게 인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06호 14면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엡스키 <38> 드레스덴: ‘악령’들의 우두머리

폴란드 감독 안제이 바이다가 만든 영화 ‘악령’(1988).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았다. 표트르의 아버지 스테판은 오마 샤리프가 연기했다.

폴란드 감독 안제이 바이다가 만든 영화 ‘악령’(1988).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았다. 표트르의 아버지 스테판은 오마 샤리프가 연기했다.

안나 부인의 출산일이 다가오자 이탈리아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도스토옙스키는 불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르는 ‘만일의 사태’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반드시 말이 통하는 곳으로 가야 했다. 부부는 결국 피렌체를 떠나 처음 유럽 여행길에 올랐을 때 잠시 머물었던 드레스덴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부부는 1869년 8월 초에 드레스덴에 도착했고, 9월 14일에는 둘째 딸 류보피가 무사히 태어났다. 도스토옙스키의 기쁨은 또다시 절정에 달했다. 이들 가족은 이곳에서 비교적 평화로운 삶을 2년 가까이 산 뒤 귀국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도스토옙스키는 육아의 기쁨을 만끽하는 가운데 『영원한 남편』을 완성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 일생에서 드레스덴은 무엇보다도 세 번째 대작 『악령』을 집필한 곳으로 기억된다.

잔악한 니힐리스트의 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다  

악명 높은 니힐리스트 세르게이 네차예프. 이바노프 살해 후 해외로 도주했다가 1872년 송환돼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옥사했다.『악령』의 표트르는 네차예프가 모델이다.

악명 높은 니힐리스트 세르게이 네차예프. 이바노프 살해 후 해외로 도주했다가 1872년 송환돼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옥사했다.『악령』의 표트르는 네차예프가 모델이다.

『악령』의 구상은 러시아 역사에 ‘네차예프 사건’으로 기록된 어느 살인사건으로부터 촉발됐다. 세르게이 네차예프(1847~1883)는 악명 높은 니힐리스트였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 니힐리스트란 모든 사상, 모든 의미, 모든 권위, 모든 도덕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급진주의자를 지칭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학생 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네차예프는 1868년 스위스로 건너가 혁명의 대부 바쿠닌, 오가료프 등과 교류했다.

처음에 그의 열정과 대담성과 카리스마는 해외 망명인사들을 매혹시켰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우수한 ‘신예’였다. 그러나 그의 이른바 ‘사상’이라는 것이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주변의 인물들은 점차 뒷걸음을 쳤다. 아나키스트 바쿠닌도 결국은 네차예프의 잔인함에 경악했다. 네차예프를 “광신이 도를 넘어 멍청이가 된 인간”으로 불렀으며, 지인들에게 그를 조심하라는 경고 메시지를 비밀리에 보내기도 했다.

네차예프의 사상은 한 마디로 ‘테러’였다. 그가 아는 과학은 오로지 하나, ‘파괴의 과학’이었으며 그의 유일한 목표는 ‘인정사정 없는 파괴’였다. “우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열정적이고, 완전하고, 무자비한 파괴뿐이다.” “그들은 이것을 테러리즘이라 부른다! 그들은 이것을 목청껏 비난한다! 내버려 둬라.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1869년 네차예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세계혁명연맹’이라는 유령 조직의 ‘러시아지부 대표’라는 유령 직함이 찍힌 신임장을 흔들며 페트롭스키 농업학교에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 학교 학생 이바노프는 사회 변혁의 뜻을 품고 조직에 참여했지만 곧 네차예프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고 탈퇴 의사를 밝혔다. 격노한 네차예프는 이바노프가 조직을 밀고할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려 조직원들을 선동했다. 1869년 11월 21일 일당은 학교 교정에서 이바노프를 구타하고 목을 조르고 권총으로 살해한 뒤 연못에 시신을 유기했다. 시신이 발견되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네차예프의 악명은 해외 혁명가들 사이에서도 극에 달했다. 마르크스가 1872년 제1 인터내셔널 헤이그 대회에서 바쿠닌을 제명하기 위해 결정적인 근거로 사용한 것도 바쿠닌과 네차예프의 교분이었다.

가벼운 정치소설 쓰려다 묵직한 사회철학 담게 돼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바탕으로 알베르 카뮈가 각본을 쓴 프랑스판 ‘악령(Les Possedes)’. 카뮈가 죽기 1년 전인 1959년 앙트완 극장 무대에 올려졌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바탕으로 알베르 카뮈가 각본을 쓴 프랑스판 ‘악령(Les Possedes)’. 카뮈가 죽기 1년 전인 1959년 앙트완 극장 무대에 올려졌다.

한 때 반정부 서클의 주요멤버이자 정치범이자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도스토옙스키는 항상 러시아 시사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았다. “해외에서도 세 가지 러시아 신문을 날마다 빠짐없이 읽고 잡지 두 권을 구독해서 본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네차예프 사건을 신문에서 접한 그는 차제에 ‘정치소설’을 한 권 쓰기로 작정했다.

폴란드 감독 안제이 바이다가 만든 영화 ‘악령’(1988)의 포스터

폴란드 감독 안제이 바이다가 만든 영화 ‘악령’(1988)의 포스터

처음에는 그저 한 석 달 정도 시간을 들여 가벼운 소설을 쓸 작정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스케일은 그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점점 더 커져갔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르익고 있던 다른 소설들이 새 소설 속으로 들어가 뒤얽혔다. “전체 구상을 열 번 이상 바꾸었고 1부는 완전히 다시 썼어요.”

모스필름이 제작한 영화 ‘악령’(1992). 감독은 이고르 탈란킨

모스필름이 제작한 영화 ‘악령’(1992). 감독은 이고르 탈란킨

1870년 8월에는 그동안 쓴 것을 다 버렸다. 책 한 권 분량의 원고가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제목조차 결정이 되지 않았다. 10월이나 되어서야 그는 마이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 책의 제목이 ‘악령’이라고 밝혔다. 소설은 ‘러시아 통보’ 1871년 1월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4부작 TV드라마 ‘악령’(2014). 감독은 블라지미르 호티넨코. 2015년 러시아 TV 드라마부문 황금독수리 상을 수상했다.

러시아 4부작 TV드라마 ‘악령’(2014). 감독은 블라지미르 호티넨코. 2015년 러시아 TV 드라마부문 황금독수리 상을 수상했다.

러시아 지방의 작은 도시에 니힐리스트 그룹이 있다. 이 그룹의 이른바 ‘정신적인’ 지도자는 지주의 아들 스타브로긴이고 실질적인 리더는 그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표트르다. 교활하고 기민한 표트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범죄를 기획하고 사주하고 실행하는 행동대장이다. 살인·강도·밀고·무고·방화 등 온갖 범죄를 통해 그는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고 그룹을 장악한다. 표트르의 지휘 아래 니힐리스트들은 자기들 ‘사업’에 방해가 되는 모든 인물을 차례로 제거한다. 조직의 일원인 샤토프가 전향의 기미를 보이자 그 역시 살해한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자 모든 범죄를 총괄해서 주도했던 표트르는 해외로 도주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니힐리스트들, 그리고 니힐리스트들이 휘젓고 다니는 러시아를 복음서에서 언급되는 ‘악령(마귀) 들린 돼지 떼’에 비유했다. ‘악령’이라는 제목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러시아 TV드라마 ‘악령’에서 표트르 역을 맡은 안톤 샤긴

러시아 TV드라마 ‘악령’에서 표트르 역을 맡은 안톤 샤긴

표트르는 네차예프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의도는 네차예프의 범죄를 폭로하는데 있는 게 아니다. “저는 신문에서 읽은 것 말고는 이바노프도, 네차예프도, 그리고 살인사건의 정황도 모릅니다. 아니, 알았더라도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의 상상력은 실제 일어난 것과 완전히 다를지도 모릅니다. 저의 표트르는 네차예프를 전혀 닮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제 상상력이 그 범죄에 상응하는 인물, 모종의 유형을 창조했다고 믿습니다.”

“현실을 수수방관한 내가 바로 사악한 현실을 만든 주범”  

러시아 TV드라마 ‘악령’(2014)에서 교활하고 잔인한 표트르를 연기한 배우 안톤 샤긴

러시아 TV드라마 ‘악령’(2014)에서 교활하고 잔인한 표트르를 연기한 배우 안톤 샤긴

그가 네차예프 사건에서 파헤친 것은 특정 사상의 문제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의 문제였다. 그는 본성의 심연에 뿌리 내린 권력 의지를 끄집어내서 하나의 인간 유형을 창조했다. 그는 네차예프를 광신자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멍청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표트르로 ‘재탄생한’ 네차예프는 인간의 권력의지를 증폭시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정치소설로 기획된 작품은 결국 철학소설로 굳어졌다.

표트르 일당 중 하나인 쉬갈료프는 전체주의의 생리를 가장 잘 요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무제한의 자유에서 출발하여 무제한의 전제주의로 가는 것”이 지상 낙원을 이룩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인류의 십 분의 일이 모든 권력을 거머쥐고 나머지 십 분의 구는 무한히 복종하는 것이 평등에 대한 그의 비전이다. “모든 노예들이 노예 제도 안에서는 평등하다.”

표트르는 그런 쉬갈료프를 “멍청한 박애주의자”라 부르며 비웃는다. 인류의 십 분의 일이 완전한 자유와 절대 권력을 누린다는 것은 나이브한 꿈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진 게 아니다. 절대 권력을 잡는 단 한 명이 될 때까지 서로 싸우는 게 인간이다. 둘만 모여도 갑과 을이 결정되고 셋이 모이면 서열이 정해지는 게 인간이다. 표트르에게 지상낙원은 아이들 동화 같은 얘기다.

그에게는 이념도 철학도 로망도 없다. 그의 관심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파괴다. “전대미문의 비열한 방탕” “음주와 유언비어와 밀고” “냉소주의와 스캔들과 완전한 불신”을 퍼뜨려 인간 실존의 도덕적 기반을 철저하게 붕괴시킨다는 게 그의 전략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전략의 종착역은 절대 권력이다. 완전한 혼돈과 파괴 후에 홀로 우뚝 서서 모든 권력을 통째로 장악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도덕의 폐허 위에 등장하게 될 권력 의지의 화신을 그려낸 것이다.

『스탈린』의 저자 라진스키는 “표트르로 형상화된 네차예프 없이는 스탈린을 이해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스탈린뿐 아니라 나치와 파시스트, 더 나아가 현대의 테러리스트는 모두 네차예프의 후예들이다. 카뮈는 『악령』이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 가장 예언적인 작품이라 상찬했다. 동명의 희곡으로 각색하여 직접 앙트완 극장 무대에 올렸으며, 노벨상 상금으로 받은 돈까지 투자했다. 33명의 배우가 등장하여 4시간 동안 열연한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악령』은 분명 테러리즘을 예고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에서 당대 현실과 미래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1860년대 니힐리스트들의 등장에 자신을 비롯한 이른바 ‘40년대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절감했다. 못된 자식은 부모 책임이란 얘기다.

도스토옙스키는 자기 세대의 잘못이 ‘러시아의 현실을 수수방관한 것’, ‘서구의 사상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것’, ‘공허한 이론만 떠들어댄 것’에 있다고 자책했다. 도스토옙스키의 반성적 사유는 표트르의 아버지인 늙은 자유주의자 스테판을 통해 드러난다. 스테판은 표트르와 그 일당의 행태를 보면서 증오와 공포에 치를 떤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어느 순간 평생 빈말만 지껄이며 살아온 자신이야말로 이 모든 사악한 현실의 ‘주범’임을 자각한다. 악령이 환자에게서 나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간 성경의 대목을 인용하면서 “우리들이 바로 그들”이며 그들의 우두머리는 바로 자신이라고 절규한다. “어쩌면 내가 그 우두머리인지도 몰라요. 선두에 서 있는 자 말이죠. 우린 완전히 무엇에 홀린 듯 광포하게 날뛰면서 절벽에서 바다로 돌진하고 있는 거에요.”

등장인물 거의 전부가 죽는 암울한 내용임에도 소설은 이 대목에서 절망의 심연을 훌쩍 뛰어넘는다. 어느 연구자는 『악령』 평론에서 자신이 돼지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더 이상 돼지가 아니라고 했다. 지식인이 자기 내면의 ‘악령’을 인정하는 사회에는 희망이 있다는 얘기 아닐까.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