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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선동열 국정감사’와 대의정치의 함정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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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

선동열 국가대표 야구팀 감독이 현역 선수 시절 ‘무등산 폭격기’나 ‘나고야의 태양’으로 불렸던 이유는 이해할 만하지만 ‘국보(國寶)’라는 특별한 애칭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 지식, 혹은 기억의 복원이 필요하다. 한국이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극적으로 제패했던 1982년, 대학생으로서 미국전·대만전·일본전을 모두 홀로 완투승이나 완봉승으로 책임지고 대회 MVP가 됐던 선 감독의 당시 이야기를 기억하거나 전해듣는다면 그가 왜 한때 ‘국보’로 불렸는지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화제성의 함정과 전문성의 함정 #적발과 추궁의 함정에 빠진 국감 #한국 야구보다 국회가 더 문제 #야구를 ‘국정’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냥 야구로 남겨둘 수 없었을까

선 감독이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장에 그저께 증인으로 불려나온 것은 물론 선수로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국정감사장이 ‘선동열 청문회’가 되고 신문·방송에 그렇게 크게 다뤄진 이유는 그가 한때 ‘국보’로 불렸던 한국 야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가 국정을 감사하는 신성한 자리에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어떤 사소한 문제까지도 국회의 감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리였기에 관심이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 지면에서 지난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 선발과 선 감독의 팀 운영과 관련된 문제의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해당 사안은 사실 국정감사로 요약되는 한국 국회의 행정부에 대한 견제가 어떤 경우에 붕괴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우리에게 대의정치의 중요한 함정들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박원호칼럼

박원호칼럼

‘선동열 국정감사’가 웅변하는 대의제의 함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화제성의 함정. 매년 정기국회 이전 주어진 짧은 기간에 정부 모든 부처가 감사의 대상이 되는 한국의 국정감사는 사실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가 힘든 제도다. 국정감사 기간은 정부의 모든 활동은 -야구 대표팀 운영을 포함해- 감사의 대상이 되는 기간이면서 동시에 어떤 몇 개의 활동이 감사의 대상이 돼야 할 것인지가 선택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보다 중요한 사안들,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문제들이 논의되고 토의돼야 할 것이지만, 언론에 한 줄이라도 언급되려면 화제성과 대중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동열 감독이 국감장에 불려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며,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관 업무 중 가장 시급한 감사 업무가 이미 금메달을 획득한 야구대표팀 구성 과정이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기 힘들다.

둘째, 전문성의 함정. 대중이 선출한 ‘비정규직’인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국회가 행정부에 비해 전문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정감사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권한을 위임받은 프로페셔널한 관료나 전문가들이 상식에 기반한 언어로 의원들을 -따라서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자리며, 이들은 더 나은 설득을 위한 자료와 논변을 밤새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문성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의원, 혹은 보좌진들 또한 밤을 새워 공부하고 준비해야겠지만 때로는 숫자로 보이지 않는 전문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할 것이다. 타율이나 방어율로는 드러나지 않는 팀의 조화로운 구성이나 분위기, 국제대회의 특수성 등에 대해 과연 의원들이 들어보고 설득당할 준비가 돼 있었던가?

셋째, 적발과 추궁의 함정. 우리 국회의 국정감사는 역사적으로 행정부의 불법과 탈법을 적발하는 폭로의 현장이었고, 그것이 우리 정치발전에 중요하게 기여한 바도 크다. 그러나 국감이 반드시 불법과 탈법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며, 정부 부처의 여러 과정을 이해하고 비판·교정하는 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국감은 한 단체가 선 감독을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으로 신고한 것으로 시작됐지만, 그 누구도 범법을 입증하지 못했다. 국정감사장을 수사나 재판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한 병역 특례의 문제나 아마추어 야구 발전을 이야기할 기회가 사라진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선동열 국정감사’는 한국 야구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의회와 대의제의 문제를 드러내 보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마치고서도 여전히 남는 답답함. 야구를 야구로 남겨둘 수 없었을까. 대표팀 선발에 대한 갑론을박을 ‘인터넷 여론’에 그냥 맡길 수 없었을까. 야구라는 놀이가 ‘국정’의 일부분이 되고 대표팀 선발이 국정감사의 대상이 되는 순간, 이와 관련된 모든 즐거운 기억과 꿈들이 사라지고 태극마크를 달았던 대학교 2학년 선동열 선수의 모습도 이제는 잘 그려지지 않을 것 같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