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지식계의 새 물결] 4. 떠오르는 섹시즘 연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섹시 스타 ○○○', '영원한 로커 ○○○'. 우리는 이런 말에서 여성을 떠올리는가, 남성을 떠올리는가? 스타나 로커는 여자일 수도 남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흔히 우리는 '섹시 스타'와 여성을, '로커'와 남성을 연결짓는가?

이걸 두고 성차별이라고 한다면 내게 돌아올 말은 뻔하다. 말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특이성격의 소유자라는 진단에서부터 섹시하다는 건 칭찬이지 차별이 아니라는 지적까지. 더구나 이런 말을 듣는 그 '섹시 스타'가 구체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차별이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차별은 아니다. 섹시즘이다. 섹시즘은 성차별을 의미하는 동시에 여성과 남성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말한다. 여성을 무조건 혐오하는 극단적인 태도에서부터 여성과 남성이 신체구조에 있어 다르고, 그 다름이 사회제도나 말.행동양식에 반영된다는 믿음까지 섹시즘에 포함된다.

섹시하다는 '칭찬'은 왜 주로 여성의 몫인가? 주로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규정되는 것, 이것이 섹시즘의 예다. 여성을 '섹시하다'고 말하며 성적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남성이다.

남성의 말과 시각이 보편적인 것으로 통하기 때문에 여성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른 여성을, 심지어 자신을 섹시하다고 말한다. 여성은 남성이 말하는 방식, 세상을 보는 방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섹시즘을 자발적으로 실천한다.

성차별은 제도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제도는 구체적이기 때문에 그 억압이 비교적 쉽게 인식된다. 반면 섹시즘은 제도를 넘어선 하나의 생활양식으로서, 법과 제도가 명령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데올로기와도 접목될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섹시즘이 국가나 이데올로기, 예를 들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만나 제도화되어 다시 우리의 일상에 스며든다. 가장 거대하면서 동시에 가장 미세한 것이 바로 섹시즘이다.

섹시즘은 말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태도와 온갖 상징과 이미지에서도 드러난다. 섹시즘을 노골적으로 이용하면서 퍼뜨리는 것 중 하나가 광고다.

남성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광고에서 묘사된 여성의 이미지는 여성 자신에게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로 내면화된다. 이미지가 만들어낸 환상과 현실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며 상호작용하는데 이들을 연결하는 것이 말이다.

말은 그 자체가 규범이다. 학교에서 배운 문법에 따라 말을 쓰지 않으면 시험에 떨어질 뿐 아니라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문법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가르친다.

남녀.부모.자녀.신랑 신부처럼 남성을 먼저 말하는 것은 남성이 긍정적으로, 여성이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선악.상하.진위.찬반처럼 언제나 좋은 것이 앞에 오지 않는가? 또 청소년이 소년과 소녀를 포함하고, 자식이 아들과 딸을 모두 가리킨다. 남성이 곧 인간을 대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의 질서를 배우면서 사회적 규범과 가치를 함께 배운다. 말은 위계질서를 표현하는 동시에 강화한다. 최근 군대 내 언어폭력 징계 조처에 대해 곧바로 기강해이를 우려하는 반응이 나온 것도 실제로 규율을 유지하는 것이 말이기 때문이다.

존댓말은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복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부부간에, 연인간에 남성이 여성에게 반말을 하고 여성이 남성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은 남성이 지배하고 여성이 복종하는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상유지와 질서에 대한 복종이 행동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거부하고 변화시키는 것도 행동이다. 차별이 일어나는 곳이 일상이라면 차별을 없애는 곳도 일상이다.

여성과 약자들을 차별하는 것은 얼굴 없는 사회나 추상적인 제도만이 아니라 말을 사용하는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행동으로서의 말이 가장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변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제까지의 페미니즘이 성차별을 구조화하는 제도에 집중했다면 21세기 성의 평등은 제도를 넘어 생활양식으로서의 섹시즘의 극복이라는 문제로 집약된다고 하겠다. 실천적으로 그것은 '일상적 파시즘'의 문제의식과 맞닿는다.

이론으로서의 섹시즘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복수의 중심성을 추구하는 섹시즘 연구는 다양한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언어학과 페미니즘 외에도 인류학.일상의 사회학.문화연구 등 학제간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정해경 언어학 박사

◇약력=▶연세대 독문과 졸업 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와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에서 수학. 언어학 박사▶언어와 현실의 관계, 특히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일상 언어에 어떻게 반영돼 있는지를 집중 연구▶저서 '섹시즘', 번역서 '칸다하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