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대학생 한글씨의 캠퍼스 분투기
내 이름은 김한글이다. 올해 스물세 살의 대한민국 예비역이다. 지방의 한 국립대 신문방송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지난 7월 육군 병장으로 전역 후 가을 학기에 복학했다.
"'렬루…'는 정말로 사랑했건만 폭풍눈물" #존버·법블레스유·할많하않·제곧내… #요즘 10~20대 일상서 쓰는 '인싸용어'
나는 매일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학교 밖보다 밥값이 싼 데다 뭣보다 JMT(너무 맛있다. '존맛탱(존X 맛탱이 있다)'의 준말)를 연발하게 하는 음식 맛 때문이다.
기자가 꿈인 나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신문과 씨름한다. 예비역 아재(아저씨)들의 집합소였던 도서관은 이제 새내기들로 북적인다. 그들 앞엔 토익책이나 공무원 참고서가 수북하다. 누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 자조했던가.
내 눈에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존버(존X 버티다) 정신이 투철하다.
이미 유치원 때부터 숱한 경쟁을 거치며 남몰래 롬곡('눈물'을 180도 돌린 말)을 흘려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웬만하면 혼술(혼자 마시는 술)·혼밥(혼자 먹는 밥)은 물론 혼코노(혼자 코인 노래방을 가다)에 익숙하다. 주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습관도 몸에 뱄다.
여전히 사회 곳곳엔 나일리지('나이'와 '마일리지'가 합쳐진 말로 나이를 앞세워 권력을 행사하거나 우대받기를 원하는 사람 또는 그런 행동)가 넘친다. 내가 등록금을 벌기 위해 밤에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 손님 중에도 많다. 이런 부류를 만날 때마다 속으로 법블레스유(법이 아니었으면 너는 이미 죽었다. '법'과 '블레스(bless·축복하다)', '유(you)'의 합성어)를 주문처럼 되뇌곤 한다.
특히 취객들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술주정을 하면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또는 갑분띠(갑자기 분위기 띠용)해지기 일쑤다. 그때마다 '이렇게까지 해서 돈을 벌어야 하나' 자괴감이 들지만, 노란마트(이마트 건물 색깔에서 착안한 유사어)에서 계산원으로 일하시는 어머니의 굽은 손마디를 떠올리며 어금니를 악문다.
가끔 늦은 밤까지 학원을 전전하다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이나 괄도네넴띤(팔도비빔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중·고등학생들을 보면 "일생가?(일상 생활 가능?)"라는 물음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내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마인드를 되새기며 퇴근 준비를 한다.
편의점에선 올해 말까지만 일할 계획이다. 최저임금이 올해 시간당 7530원에서 내년 8350원으로 10.9% 오르자 사장님 부부가 "인건비 부담이 크다"며 아르바이트생을 쓰지 않기로 결정해서다. 40대 중반인 사장님은 나를 채용할 때부터 편의점의 비담(비주얼 담당)이라며 예뻐해 주셨다. 쇼핑몰을 운영하는 지인이 줬다며 전차스(전자파 차단 스티커)도 선물했다. 중년이지만 애빼시(애교 빼면 시체)인 사장님도 경기 불황 여파로 가게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되자 표정이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의 합성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공부와 아르바이트만 한 건 아니다. 1학년 봄 학기 때 신청한 '포스트모던 과학 논쟁'이라는 수업 첫날 옆자리에 앉은 국문과 1학년 여학생 J를 보고 짝사랑에 빠졌다. J의 다이어리 표지엔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기형도 시인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라 믿는 나는 렬루(정말로. '리얼(real)로'를 귀엽게 발음한 말) J가 좋았다. 얼마나 와우내(놀라움을 나타내는 'Wow(와우)'에서 파생된 말)를 외쳤는지 모른다.
게다가 J는 커엽다(귀엽다. '귀'와 모양이 비슷한 '커'를 넣어 만든 말). 나는 J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는 덕페이스(셀카를 찍을 때 오리(duck)처럼 입술을 내미는 표정)를 보는 게 낙이었다. "예쁘면 톤그로('톤(색조)'과 '어그로(분쟁)'의 합성어로 화장한 얼굴이 너무 떠 이목을 끄는 것) 따위는 없다"는 말은 진리다. 나는 3000원짜리 밥을 먹으면서도 J에게는 밥값보다 비싼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곤 했다. J를 좋못사(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다)했지만, 끝내 고백하지는 못했다. J 옆엔 우리 학교 킹카로 불린 4학년 예비역 선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배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유남(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남자)이자 핵인싸(무리 속에서 아주 잘 지내는 사람. 중심을 뜻하는 '핵'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을 의미하는 인사이더(insider·내부자)의 합성어)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은 사바사(사람 by 사람. 사람에 따라 다르다)였다. 혼자서 수백 번 행복회로(현실과 다른 행복한 상상을 하는 상태)를 돌려봤지만 허사였다. 클럽에서는 처음 만난 여자들에게 곧잘 번달번줌(전화번호 달라고 하면 번호 줄 거니?)하고, 삼귀다('사(4)귀다'보다는 덜하지만 가깝게 지내는 사이)까지 갔지만, J 앞에만 가면 난 고답(고구마 먹은 것처럼 답답하거나 그런 사람)으로 둔갑했다. J 친구들은 날 아싸(아웃사이더. 무리에서 겉도는 사람)라 불렀다.
J의 SNS에 "나는 문찐(문화찐따. 문화나 최신 유행에 뒤처진 사람)이 아니다"는 말을 남기고 싶어도 누군가 '누물보?(누구 물어보신 분?)'라고 악플을 달까봐 포기했다.
J와 수차례 머쓱타드(겨자 소스인 '머스터드'와 '머쓱하다'를 합친 말)한 상황이 있었지만, 끝내 난 마상(마음의 상처)만 입은 채 닭 쫓던 댕댕이(강아지. '멍멍이'에서 '멍멍'과 모양이 비슷한 '댕댕'을 넣어 만든 말)가 됐다. J를 맘속에서 떠나보내던 날, 난 밤새 롬곡웊눞('폭풍눈물'을 뒤집은 말)을 쏟았다.
제대 후 세상에 나오니 별다줄(별것을 다 줄인다)이란 생각이 든다. 세종 대왕이 만든 훈민정음(訓民正音)보다 국내 한 인터넷 야구 갤러리에서 한글의 특정 음절을 비슷한 모양의 다른 음절로 바꿔 쓰는 방식이 굳어진 야민정음(野民正音)이 대세가 된 듯하다. 여기에 급식체(급식을 먹는 초중고생이 쓰는 말)까지 매일 쏟아지니 바야흐로 신조어 홍수 시대다.
오늘은 572돌 한글날이다. 세종 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반포(1446년)를 기념하기 위해 정부가 제정한 국경일이다. 법정 공휴일이지만, 중간고사를 앞둔 난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왔다. 공부하는 틈틈이 푸른 가을 하늘을 보며 바나나맛 우유 한 모금 마시는 게 나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여기서 더 얘기하는 건 TMI(너무 과한 정보. 'Too Much Information'의 준말) 아닐까.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본 기사는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10~20대 젊은 층이 자주 쓰는 신조어이자 인터넷 용어인 이른바 '인싸용어' 42개를 바탕으로 허구의 20대 복학생의 일상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