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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개혁 17년 토론, 17만 명 여론조사도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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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즉위 600년 다시 보는 세종 <상> 

17년간에 걸친 세종의 공법 도입은 문재인 정부가 원전 처리, 대입제도 개편을 두고 실시한 공론조사, 숙의 민주주의를 연상케 한다. 세종 버전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라고 해야 할 『고려사』 편찬에는 30년이 넘게 걸렸다.

세종, 백성 세금 줄일 공법 도입 #황희가 문제점 지적하자 보류 #반대 의견까지 수용해 합의 도출 #“임금의 과실 인멸하지 말라” #역사 왜곡 없앤 고려사 편찬도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 전시된 세종대왕 어진(운보문화재단 소장). [연합뉴스]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 전시된 세종대왕 어진(운보문화재단 소장). [연합뉴스]

◆공법 도입=세종은 농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지금의 소득세에 해당하는 공법 도입에 즉위 초부터 관심이 많았다. 정부 관리가 매년 농가의 소출 실적을 직접 조사해 과세하는 ‘답험손실법’이 당시 시행됐는데, 세종은 관리들의 부정 소지가 많다고 봤다. 즉위 이듬해에 관리가 작황 평가를 제대로 했는지 농민이 확인토록 한 데 이어, 일괄적으로 일정액의 세금을 내도록 하는 파격적 구상을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세종의 초안은 기나긴 논의 과정에서 첫 구상과 달라진다. 하지만 반대 의견까지 수용해 합의안을 도출한 과정은 21세기 민주주의 기준에 비춰봐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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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1427년 과거시험 문제로 공법에 대한 의견을 물으며 공법 도입을 공론화한다. 그러자 좌의정 황희가 “풍흉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눠 징수하는 게 옳다”며 세종의 일정액 부과 방안에 반대하고 나선다. 이에 세종은 1429년 말 재무 부서인 호조(戶曹)에 명해 전국적 규모의 공론조사를 실시한다. 1430년 3월부터 8월까지 17만여 명이 이 조사에 참가했다. 조사 결과 찬성이 9만8657명, 반대가 7만4179명. 하지만 세종은 법 시행을 보류한다. 지두환 국민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찬성이 더 많았는데도 반대 목소리가 크자 세종은 시행을 멈췄다. 당시 공론조사로 파악한 여론은 이후 공법을 최종 완성할 때 논의의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6년 뒤인 1436년 세종은  공법 논의를 재개한다. 이 과정에서도 황희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가다듬었고, 결국 1444년 공법을 확정한다. 농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전분6등제), 한 해의 흉풍년 정도에 따라 9등급(연분9등제)으로 나눈 다음 그에 따라 세분화해 총 54등급(6X9)의 차등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었다.

최윤오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공법은 고려 이후 증대된 토지 생산성을 파악하고, 중간 수탈을 막고자 했던 세종의 의지였다”며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추진됐던 토지 파악과 수취 방식 기준이 이를 통해 마련됐다”고 말했다.

여진족 막고 한글 만들고, 분주했던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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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편찬=고려사 편찬은 1419년에 착수해 세종이 세상을 뜬 이듬해(1451년)에 끝났다. 신생국 조선은 나라가 처한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고려사가 필요했다. 1392년 정도전 등이 편찬에 착수해, 1395년 『고려사』를 완성했으나 태종은 이를 고쳐 쓰게 한다. 부왕 이성계에 대한 서술 등이 미흡하다는 이유였다. 그 임무를 맡은 하륜이 사망해(1416년) 중단됐던 고려사 개수 작업을 세종은 1419년 변계량을 시켜 다시 쓰게 한다. 하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자 1423년 이를 고쳐 쓰게 하며 말한다. “마땅히 사실에 의거해 직서, 포폄이 스스로 드러나게 해 후세에 전해 신빙되게 하면 될 것이다. 굳이 전대 임금을 위해 과실이 숨겨지도록 고쳐서 인멸할 필요 없다.”(세종 5년 12월)

하지만 세종은 변계량이 개수한 『고려사』에도 왜곡이 있다고 봤다. 핵심 쟁점은 ‘있었던 대로 쓸 것이냐(직서), 고쳐 쓸 것이냐(개서)’ 문제였다. 특히 고려의 황제 제도를 어떻게 서술하느냐가 관심사였다.

1424년 세종은 변계량의 반대 의견을 받아들여 직서로 수정된 고려사를 반포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1430년 변계량이 사망하자 1432년 고려사 개찬을 지시한다. 반대 목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완성된 『고려사』는 신뢰할 만한 역사 자료라는 게 학계의 평가다. 세종은 왜 직서를 고집했을까. 이익주 시립대 교수는 “고려에 대한 왜곡되지 않은 기록이 조선의 제도 정비에 유용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준봉·김호정·노진호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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