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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패션이라는 롤러코스터에서 내리고 싶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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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호 30면

영화 ‘맥퀸(McQueen)’ 

다큐멘터리는 결국 누군가의 시선이다. 사실을 그리되 진실은 보는(혹은 보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이 여정에 따라나서는 관객은 새로운 진실을 갈구하는 동행자다.

2010년 자살한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Lee Alexander McQueen·1969~2010)을 그린 다큐멘터리 ‘맥퀸(McQueen)’도 마찬가지다. 패션 영화라는 타이틀이 외려 부담이다 싶게, 시선은 우리가 잘 몰랐던 한 청년 창작자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맥퀸이 누구인가. ‘영국 최고의 디자이너상’을 네 번이나 받았고, 한때 파리 패션하우스 지방시의 디자이너였으며, 결국 자신의 이름을 세계적 브랜드로 만든 ‘패션의 앙팡테리블’로 기억되는 자다. 하지만 영화는 천재 디자이너의 성공은 한 켠에 접어두고 그의 속내를 파고든다. 디자이너가 직접 찍은 동영상에서 포착한 비공개 장면과 친구와 가족들이 인터뷰를 씨줄 날줄로 엮어낸다. 디자이너 톰 포드는 물론 헤어 디자이너, 어시스턴트 디자이너, 친구, 가족 등이 등장해 ‘진짜 맥퀸’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마주한 맥퀸은, 짠하고 애틋하고 때로는 안쓰럽다.

영화는 거듭 말한다. 비록 또라이에다 비호감이었지만, 그의 끼와 열정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또 누구보다 강렬한 비전을 지니고 있었다고. 그래서 맥퀸은 패션을 하기 위해 돈이 절박했고, 돈을 해결하면 다시 패션을 고민했던 뫼비우스의 띠에 빠져 있었다고 말이다.

몇몇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런던 새빌로우가의 양복점에서 재단의 기본기를 닦은 그는 패션 스쿨 세인트 마틴에서 석사 과정을 거치며 거침없는 실력을 발휘한다. 어느 것 하나 기존 방식을 따르지 않는 혁명가로서 말이다. ‘희생자들을 좇는 살인마 잭’(1992)이라는 테마의 무시무시한 졸업 의상 역시 옷 안감에 머리카락을 붙이고 피 흘리듯 붉은 물을 들인다. 당시 패션계에 막강한 입김을 지닌 저널리스트 이사벨라 블로우가 이에 반해 그를 불렀지만 정작 맥퀸은 어땠을까. “그가 누군지도 몰랐고, 350파운드만 주면 옷을 팔겠다고 했다”고 회고한다.

졸업 이후에는 실업수당을 받아 옷감을 사서 패션쇼를 준비한다. 그러다 완성한 ‘하이랜드 레이프’(1994)라는 컬렉션은 그를 일약 스타 디자이너로 만든다. 마치 성폭행을 당한 듯 찢긴 옷을 입고 등장하는 모델들을 보고 “대체 이 불편하고 혐오스러운, 하지만 새로운 옷을 누가 만들었냐”는 세간의 관심이었다.

이것이 인생 풀리는 청신호라면 좋으련만, 패션쇼 백스테이지마냥 후일담은 초라하다. “(성공했다는) 쇼가 끝나고 당장 45센트짜리 우유 살 돈이 없는 게 현실이었다.”

여기에 그가 왜 이토록 범죄현장처럼 공포를 극대화시켜 무대에까지 끌고가는가에 대한 단초도 제시된다. 어릴 적 매형에게 성추행을 당한 기억, 매형에게 폭행 당하는 누나를 종종 목격했던 트라우마였다. 그에게 패션쇼란 “당시 본인과 여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퇴마의식”이었던 셈이다.

이후 럭셔리의 거물인 LVMH(루이비통모에헤네시)그룹이나 구찌 그룹(현 케링그룹)과 인연을 맺은 건 과연 행운이었을까. 97년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되자 연봉 받아 자기 브랜드를 키우겠다고 기뻐한 건 이내 재앙이 됐다. 첫 쇼에서부터 “지방시를 뺏어 저렇게 해놨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맥퀸답지 않은’ 컬렉션을 일 년에 10번씩 했다.  

2001년 구찌 그룹이 알렉산더 맥퀸 브랜드 지분의 50%를 인수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성복에다 세컨드 라인까지 브랜드가 커지면서 일 년에 14번이나 쇼를 열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맥퀸답게’, 늘 새롭고 싶어했다. 로봇이 등장해 흰 드레스에 페인트를 쏘고, 홀로그램 모델이 등장하고, 육중한 여인이 가면을 쓴 채 나체로 누워있는 쇼를 선보였다.

결국 그는 넌더리를 냈다. 하나가 끝나면 허탈해질 틈도 없이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대한 쳇바퀴였다. “이제 관두고 싶어. 롤러코스터를 멈춰, 내리고 싶어. 패션 시스템 전체가 나와 대적하는 느낌이야.” 죽기 전 마지막 컬렉션을 앞둔 그의 말은 그를 밀어준 이사벨라 블로우와 어머니의 잇따른 죽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의 자살 배경에 새로 찾은 열쇠처럼 전율로 다가온다.

다큐멘터리라지만 구성은 그의 패션쇼만큼이나 극적이다. 맥퀸의 인생을 다섯 가지 챕터로 나누고, 각 챕터마다 과거 주요 컬렉션의 테마를 이름 붙였다. 시간적 흐름 대신, 주제별로 치고 빠지며 1시간 51분의 러닝 타임을 긴장감 있게 이끈 한 수다. 광고·영화를 넘나들며 세련된 감각을 보여주던 이안 보노트 감독과 국제 각본상 수상자였던 피터 에트귀의 공동 연출이 빛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주)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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