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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 바로 아래 최북단 ‘펀치볼’ 사과밭 … 맛도 최상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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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호 21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 강원도 양구 펀치볼 ‘애플카인드’ 

강원도 양구군 펀치볼에 있는 사과 과수원 애플카인드(AppleKind). 앞에 보이는 사과나무는 홍로 품종이며 이미 수확을 마쳤다. 신인섭 기자

강원도 양구군 펀치볼에 있는 사과 과수원 애플카인드(AppleKind). 앞에 보이는 사과나무는 홍로 품종이며 이미 수확을 마쳤다. 신인섭 기자

시래기로 유명한 펀치볼에는 시래기 무보다 인삼∙사과밭이 더 많아 보였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분지(일명 펀치볼), 휴전선 바로 아랫마을인 이곳에 새로운 사과 명산지를 예고하는 농사기업이 있다. 농업회사법인 ㈜애플카인드. Applekind를 글자대로 풀면 사과족(族)이다. 그들은 ‘사과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소개한다. 그들의 바람은 ‘사과 한 알이 만드는 더 나은 세상’이다.

19만㎡ 단일 사과밭 국내 최대 규모 #직접 생산한 퇴비를 보약 삼는 농법 #사과, 단맛·신맛 가득하고 과육 단단 #상위 1% 사과, 세계 10대 과수원 꿈

밑그림과 자본을 댄 김철호(63) 회장과 관리∙재배기술을 맡은 손기홍(60) 사장이 중심에 있다. 젊지 않은 나이에 사과에 인생을 바친 두 사람이다. 휘하 인원은 김 회장의 세 아들을 포함해 25명쯤 된다.

강원도 양구 펀치볼의 사과 과수원 애플카인드(AppleKind)에서 재배한 사과. 오른쪽이 제일 상품인 사과로 1개 무게가 500g에 육박한다. 신인섭 기자

강원도 양구 펀치볼의 사과 과수원 애플카인드(AppleKind)에서 재배한 사과. 오른쪽이 제일 상품인 사과로 1개 무게가 500g에 육박한다. 신인섭 기자

지난겨울 지인이 알려줘 이곳 사과를 처음 사 먹었다. 2016년 나무를 심어 처음 수확한 사과다. 맛이 놀라웠다. 깎지 않고 통째 먹어보니 이가 잘 안 들어갈 정도로 과육이 단단했다. 단맛이 지배한 요즘 사과와 다르게 탄력 있는 신맛도 힘찼다. 덥석 깨물면 과즙이 아침 햇살처럼 입안으로 터지며 침샘이 파르르 떠는 신맛이었다. 몇 번 우물거리면 단맛이 서서히 우러나오는 사과. 오래 그리워하던, 갓 딴 홍옥 맛이 생각났다.

올해 조생종 홍로 수확 소식을 듣고 지난달 10일 찾아가 인제 원통(가공장)~양구 펀치볼(밭)을 오가며 이틀간 생산과정을 살펴봤다. 홍로 수확은 끝나고 가공장에서 선과 작업이 한창이었다. 흠과를 골라내고 크기별로 나눠 포장하는 일이다. 지난여름 지독한 더위에 사과가 빨리 익어 수확을 여드레나 앞당겼다고 한다. 주력 품종인 후지는 오는 20일부터 수확할 예정이다.

강원도 양구 펀치볼의 사과 과수원 애플카인트에서 만든 건조 사과 애플칩과 사과쥬스. 신인섭 기자

강원도 양구 펀치볼의 사과 과수원 애플카인트에서 만든 건조 사과 애플칩과 사과쥬스. 신인섭 기자

자리에 앉자 갓 딴 홍로를 맛보라며 내왔다. 기대한 대로 과육은 단단하고 신맛의 균형도 탄탄했다. 홍로에서 느끼기 어려운 질감과 맛이다. 만생종 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란 과일의 특성이 잘 살아 있었다. 이곳은 과수를 심기 전부터 자연에 가까운 토양 만들기에 주력했고, 수확기에 유기양분을 관수(땅에 묻은 관을 통해 뿌리 가까이 방울방울 뿌림)해 맛의 균형을 조율한다.

원통 가공장에서 22㎞ 북쪽에 있는 사과밭으로 갔다. 펀치볼 서쪽 산자락 중턱, 해발 520~610m에 터 잡은 사과밭은 북위 38도 17분 13초(구글 위성지도 기준) 남한 최북단이다. 19만8347㎡(6만평) 드넓은 구릉에 사과나무 1만5100그루가 자라고 있다. 단일 사과밭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한다. 앞으로 33만㎡(10만평)까지 늘릴 계획이다.

직선거리로 휴전선 이남 5㎞가 채 안 되는 곳까지 사과밭이 북상한 이유는 무엇보다 온난화에 대비한 장기 포석이다. 50년 뒤에도 사과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 중에서 한 자리에 이만큼 큰 농지 매물이 없었다. 펀치볼은 지형의 영향으로 일교차와 연교차가 크다. 여름에도 기온이 30도를 넘는 날이 많지 않다. 바람이 많아 병충해 발생도 적어 사과 재배에 적지라고 한다.

사과 주산지는 경북에서 강원도로 꾸준히 이동하고 있다. 농촌진흥청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온난화가 지난 100년의 속도로 진행될 경우 2060년 무렵 남한에서 사과 재배가 가능한 곳은 강원도 산간뿐이다. 양구군의 사과 재배면적은 1970년 9.2㏊에서 2015년 96.4㏊로 약 10.5배로 늘었다(4월 10일 통계청 발표). 손 사장 말로는 훨씬 더 넓다. 지난해 1653㎡(500평) 이상 재배 농가를 조사해보니 440㏊(133만평)였다.

강원도 양구 펀치볼에 있는 사과 과수원 애플카인드의 퇴비장. 1200평 면적의 퇴비장에서 나무 부스러기, 한약재 찌꺼기 등과 함께 약간의 계분(닭똥)을 섞어 고온 발효해 퇴비를 만든다. 신인섭 기자

강원도 양구 펀치볼에 있는 사과 과수원 애플카인드의 퇴비장. 1200평 면적의 퇴비장에서 나무 부스러기, 한약재 찌꺼기 등과 함께 약간의 계분(닭똥)을 섞어 고온 발효해 퇴비를 만든다. 신인섭 기자

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과수를 심기 전에 만들었다는 3967㎡(1200평) 넓이의 퇴비장이다. 밭에 깊이∙너비 각 1m 고랑을 판 뒤 미리 만든 퇴비를 채우고 그 위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퇴비장의 60%는 퇴비사, 40%는 후숙실이다.

퇴비사에는 가로∙세로∙높이 3x10x2m 규격의 퇴비홀 32개를 두 줄로 나란히 설치했다. 침엽수 우드 칩과 쌀겨∙깻묵 등에 효소를 섞어 퇴비로 만드는 발효조다. 105~120일 발효한 퇴비는 6개월 후숙해 나무에 뿌려준다. 흙에 한약 찌꺼기와 골분∙어분∙콩깻묵∙게껍질 등을 섞어 발효한 유기질비료, 유기오일, 강산성(pH 3.9) 액비도 생산한다. 집착에 가깝게 퇴비에 매달리는 이유는, 사과 품질은 땅심에서 나오고 땅심을 지키는 방법은 퇴비가 최선이라 믿기 때문이다.

애플카인드의 사업목표는 ▷상위 1% 사과 만들기 ▷국내 10대 식품기업 ▷세계 10대 과수원이다. 좀 지나치다 싶은 꿈의 씨앗을 외진 산골에 뿌린 사람은 김 회장이다. 꿈을 일구려 2016년부터 올 연말까지 들이는 돈이 93억원이다.

강원도 양구 펀치볼의 사과 과수원 애플카인드를 일군 두 주인공. 왼쪽이 김철호 회장(왼쪽)이고 오른쪽이 손기홍 사장이다. 신인섭 기자

강원도 양구 펀치볼의 사과 과수원 애플카인드를 일군 두 주인공. 왼쪽이 김철호 회장(왼쪽)이고 오른쪽이 손기홍 사장이다. 신인섭 기자

그는 한때 ‘전설’이라 불릴 만큼 성공한 고입 학원 원장이었다. 한 해 특목고에 774명을 합격시킨 적도 있다. 학원을 30년 하다 보니 힘이 들어 주말마다 산을 올랐다. 백두대간 종주도 두 차례 하면서 자연 속에 있을 때 행복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즈음 썩지 않는 사과 이야기를 소개한 기무라 아키노리(木村秋則)의 『기적의 사과』를 읽고 마음이 동했다. 2009년 국내에 출판된 이 책의 핵심 내용은 나무보다 흙을 먼저 살려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귀농과 안전한 먹거리를 자주 생각했다. 무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아 『기적의 사과』처럼 안전한 사과를 키워보자고 마음먹고 공부하다가 ‘사과 고집쟁이’ 손 사장을 만나 꿈에 날개를 달았다.

학원을 접고 귀농하려는 계획에 부인은 반대했다. 강남에 빌딩을 한 채 사자고 했다. 김 회장은 “안전이야 하겠지만 재미는 없을 테고, 그러면 죽어 있는 삶인데 무슨 의미가 있냐”고 부인을 설득했다. 2011년 정원을 4개 갖춘 55평 펜트하우스를 급히 처분하고 강원도 인제 가리산으로 들어갔다. 현재 살림집이 있는 곳이다.

“삶의 화두가 재미와 행복”이라는 그에게 요즘 행복한지 물었다.

그는 “사람들과 일하고 사과가 자라는 걸 보면 즐겁고 행복하다. 사업 리스크는 부담이다. 준비한 자금이 20% 남았는데 현금이 제대로 돌려면 2년 남았다. 그 걱정 빼면 행복하다”고 답했다.

 거대한 그릇 같아 펀치볼… 을지전망대 오르면 한눈에

강원도 양구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펀치볼 전경을 휴대폰 파노라마로 촬영한 모습. 신인섭 기자

강원도 양구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펀치볼 전경을 휴대폰 파노라마로 촬영한 모습. 신인섭 기자

애플카인드 사과밭이 있는 펀치볼은 지형이 계란 껍데기를 세로로 자른 모양이다. 유엔 종군기자들이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이곳이 화채 그릇과 닮았다고 펀치볼(Punch bowl)이라 부르기 시작해 원이름인 해안(亥安)분지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옛날 이곳은 기운이 습해 사람이 밖에 나가기 어려울 만큼 뱀이 많았다 한다. 어느 스님이 집집이 돼지를 키우라고 알려줘 돼지를 키우자 뱀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명이 돼지 해(亥), 편할 안(安), 해안이 됐다 한다.

행정구역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남북 7㎞ 동서 3.5㎞ 타원형 분지다. 전체 면적은 여의도 제방 안쪽(2.9㎢)의 21.2배인 61.52㎢(1860만9800평). 특이한 지형은 둘레에 더 단단한 편마암류, 안쪽에 덜 단단한 화강암이 섞여 있다가 무른 안쪽이 깎여 나가면서 생긴 차별침식의 결과다. 해발 800∼1300m 산줄기가 둘레를 감싸고, 고도 400∼500m의 분지 바닥 면적은 23㎢(695만7500평)이다.

둘레로 북서쪽 가칠봉(1242m), 서쪽 대우산(1179m), 남쪽 대암산(1304m), 동쪽 달산령(807m)·먼멧재(730m) 등 산릉이 이어진다. 가칠봉∙대암산은 추운 겨울날 일기예보에 자주 나오는 이름이다. 대암산 정상부에는 4500년 전 형성된, 국내 유일의 고층습원(高層濕原) 용늪이 있다. 1973년 천연기념물 246호로 지정됐고, 97년 국내 첫 람사르협약 습지보호지역으로 등록됐다.

분지 안에는 바닥과 산자락을 개간한 농지가 여의도의 11.4배인 33㎢(1000만평)에 이른다. 현재는 인삼밭이 가장 많아 전체의 20%쯤 되고, 그다음 많은 사과밭이 점차 늘고 있다.

구글 위성지도에서도 바로 눈에 띄는 해안분지 전경은 한눈에도 장쾌하다. 휴전선 바로 남쪽에 설치한 을지전망대에 오르면 발아래 그 장관이 펼쳐진다. 신분증 제시하고 입장권을 끊어야 올라갈 수 있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lee.tackhee@joins.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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