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조선=문명’ ‘일본=야만’ 이분법은 없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04호 30면

조선통신사는 일본서 무엇을 보았나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창비

일본 견문기 35종 집중 분석 #초기에는 대일 우월의식 드러내 #할복자살·근친결혼 등에 혐오감 #첩보전과 같은 필담 대화 #상대국에 대한 정보수집 뜨거워 #“일본의 과학발전 배워야” 조언도 #유교평화론에 갇힌 조선 #일본 무력증대 제대로 파악 못해 #2018년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나

그 이론적 모색의 뿌리가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민주평화론’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다’는 팩트를 내세우며 민주국가들로 이뤄진 세계의 항구적인 평화를 꿈꾼다.

시공을 초월해 이론은, 전쟁에서건 평화에서건 성공에 필요한 방략을 제시한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문인 일각에서는, ‘민주평화론’을 패러디해 일종의 ‘유교평화론’라고 부를 수 있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다. 신도와 불교를 믿는 일본이 유교화되면 조선과 일본이, 나아가 중국이 포함된 동북아 전체가 평화를 구가할 수 있다는 것. ‘유교평화론’은 탁상이 아니라 현장에서 탄생했다. 조선통신사 사절단이 ‘유교평화론’의 주창자였다.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는 통신사 일원들이 남긴 일본 견문기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부터 1764년까지 170여년간 집필된 견문기 35종을 주요 1차 자료로 삼았다. 이 견문기 35종은 비교 문화론, 비교 정치학의 보고다.

재일교포 3세인 저자 박상휘 박사는 일본 도쿄외국어대와 도쿄대를 거친 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조선통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국 중산(中山)대 국제번역학원 특빙연구원이다.

이 책은 우선, 조선을 일본에 선진 유교문명을 한 수 가르쳐준 ‘시혜(施惠)’의 주체로 보는 시각을 탈피하려는 시도다. 물론 유교라는 기준으로 보면 조선은 문명, 일본은 야만이었다. 적어도 통신사 파견 초기에는 시혜의 측면이 강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의 권력 엘리트는 대부분 문맹이었다. 승려들만 글을 알았다.

조선통신사와 일본 문인들이 나고야에서 필담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 그림은 나고야 명소를 소개하기 위해 18세기 일본에서 출판된 서적에 실렸다. 필담은 우리 사절단의 주요 업무였다. 필담은 즉시 일본에서 출간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 중앙포토]

조선통신사와 일본 문인들이 나고야에서 필담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 그림은 나고야 명소를 소개하기 위해 18세기 일본에서 출판된 서적에 실렸다. 필담은 우리 사절단의 주요 업무였다. 필담은 즉시 일본에서 출간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 중앙포토]

통신사가 목도한 일본은 ‘공자 왈 맹자 왈’하는 사대부가 아니라 허리에 칼을 찬 무인들이 지배하는 야만적인 사회였다. 모든 면에서 조선과 거꾸로였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호생오사(好生惡死)라는 유교 문명, 아니 모든 문명의 보편적인 대전제를 거슬러, 일본은 오히려 목숨보다 죽음을 더 숭상하는 낙사오생(樂死惡生), 인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 나라였다.

통신사는 특히 할복이나 칼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시체를 시험 삼아 베어보는 시검(試劍)을 목격하거나 전해 듣고 경악했다. 극심한 할복자살의 경우 자신의 배를 가른 다음 손으로 내장을 끄집어내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일본의 근친결혼 풍습, 성 풍속도 혐오스러웠다. 일본은 미스터리였다. “천하에 백성을 학대하고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는 조선 사대부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흔드는 나라가 일본이었다.

만남이 계속되면서 조선 문인들의 시각은 변하기 시작했다. 시각의 진화에는 일본 자체의 긍정적인 변화가 한몫했다. ‘왜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왜노(倭奴) 가운데도 착한 사람이 있다’라는 인식이 싹텄다. 통신사 파견을 계기로 양국에서 글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진정한 우의를 나누었다. 의견대립으로 갈등도 있었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우리 속담처럼 양국 문인들 간에 감정적 유대의식이 깊어졌다. 헤어질 때 뭉클했다. 눈물을 삼켰다. 헤어짐에 도를 넘어 비통해하는 일본 측 인사는 알고 보니 백제의 후예였다는 기록도 있다.

양국 대표들은 필담으로 글솜씨를 겨루었다. 우리측 통역의 일본어 실력이 신통치 않아 소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문인에게 우리 사절단과 필담을 나누는 것은 ‘가문의 영광’, 유명해지는 지름길이었다. 필담 기록은 우리 사절단이 일본에 머무는 기간에 출간됐다.

필담은 일종의 치열한 첩보전, 정보 수집 전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조선 문인은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가능성은 없는지 궁금했고(귀국 후 통신사 정사는 이 문제를 조선 국왕에게 보고해야 했다), 일본 문인은 조선이 일본에 보복하지는 않을지 궁금했다. “조선국이 보복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식이 일본 내에 퍼져 있었다. 조선 문인들은 일본 사람들이 전쟁을 반복했던 과거를 뉘우치고 있다고 귀국 후 견문기에 남겼다.

‘일본은 언제 어떻게 한국을 앞서가기 시작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힌트를 주는 책이다. 갈수록 통신사가 접한 일본은 발전을 거듭했다. 조선의 일본 방문객들은 일본 사찰이나 권력자들 집의 화려함, 시장의 화려함에 대해 유교적 관점에서 ‘사치는 망국의 지름길이다’라는 식으로 무시하려고 했다. 한편 일본 일반 백성, 서민의 소식(小食)을 비롯한 검약한 의식주에 대해서는 우리 사절단도 칭찬했다. 유교의 가르침과 일치했기 때문. 당시 일본인의 식사는 조선인의 2분의 1, 3분의 1에 불과했다고 우리 사절들이 기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의 문물(文物)에서 물(物)뿐만 아니라 문(文)의 발전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일본 도시의 융성함이 중국 도시에 버금간다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상당수 우리 실학자들 사이에 일본에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싹텄다. 조선 개혁안에 일본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통신사 초기에는 일본 승려들만 한문을 쓸 줄 알았다. 점차 일본에 한문을 구사하는 독립적인 유교 전문가 집단이 형성됐다. 통신사 초기에는 우리 사절단 일원과 필담을 나누는 것만도 일본 유교 집단에서 행세할 기회였다. 점차 우리 사절단과 대등하게 시문을 논하고 심지어는 우리측 대표들의 필력을 무시하기까지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 문인들의 ‘유교평화론’은 결국 순진한 희망 사항으로 판명 났다. 일본은 결국 임진왜란의 전철을 밟아 대륙침략에 나섰다. 상당수 조선 문인들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장평화(armed peace)’를 일본의 유교화에서 비롯된 평화로 착각했다. 국제정세가 바뀌자 ‘유교평화론’은 휴짓조각이 됐다.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는 ‘조선은 일본을 제대로 보았는가’를 묻는다. 우리 조상들이 물론 우리가 주자학 선진국이라는 관점에서 일본을 한 수 아래로 봤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보기에도 놀라운 객관성으로 일본을 파헤쳤다. 우리 조상은, 일본 병역 제도, 표준화된 도량형, 정밀한 기계 도구와 일용품 생산, 조선술의 발전,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기술자를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 다다미의 정교함 등에 대해 일본의 장점을 인지하고 칭찬하는 데 절대 인색하지 않았다.

후손인 우리는 일본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2017년 700만을 돌파한 방일 한국인은 일본을 과연 객관적으로 살피고 있는가. 앞으로도 역사는 준엄하게 물을 것이다.

유교라는 렌즈는 일본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하였다. 물론 유교에도 보편성·객관성이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는 민주주의나 시장경제라는 현재로써는 상당한 보편성·객관성을 확보한 시각으로 한일관계를 보려고 한다. 그것으로 충분할까.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